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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Oct 12. 2021

지는, 쏜애플 좋아했던 게!

전교조 계간지 <우리 아이들> 여름편에 실은 일상 속 성인지감수성 이야기

작년에 아웃박스의 성평등 수업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습니다. 올해 이어가게 되면서 무슨 글로 마음을 전하면 좋을까 고민했습니다. 아웃박스 소속 교사가 아니라 시민 개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성인지감수성에 관해 고민하고 사는 일상을 산뜻하게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아, 이제 땐뽀걸즈*도 어디 가서 추천 못하겠네. 너무 좋아했는데."

  "뭔 소리야."

  "이승X 피디 못 봤어? 오늘** 트위터에 떴어. 유부남이 어린 다큐 감독 지망생한테 자기 싱글이라 뻥까고 연애하셨댄다. 미혼모인 여동생이랑 조카 뒷바라지하고 산다 했는데 그게 부인이랑 아들이었던 거지. 내가 그 아내라고 생각하면 천불이 나."

   하... 띵했다. 재작년 공중파 시사예능에 우리를 불러주었던 사람이다, ‘기계적 중립 찾는 대신 기울어진 중심을 옮기고 싶다’고. 프로그램 사전 인터뷰에서 조곤조곤 기획을 풀어놓는 걸 들으면서 '진정성 있는 분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내 뇌를 꺼내서 빨고 싶다. 진정성 개나 줘라. 아니지, 개는 무슨 죄람.  


                                                                            ◆


  2017년 여름, 이수역 아트나인 근처 어느 식당엔가 둘러앉아 국물이 졸아드는 것도 모른 채 세 시간이 넘도록 열띠게 토론하게 만든 영화 <꿈의 제인>과, 나는 옴팡지게 사랑에 빠졌더랬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엉성한 평화가 좋았다. 그렇게 얼기설기 위태롭게 빛 한 조각을 겨우 집안에 들여놓고는,    

“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 뭐하니, 그래서 다같이 사는 거야.”

하고 말하는 배짱이 좋았고, 이주영-이민지-구교환 배우의 조합도 굉장히 굉장했다. 영화감독이 내 친구 Y의-친구의-남친이라 하니 그것도 어쩐지 아는 사이처럼 느껴져 우쭐했다. 가는 곳마다 그 섬세함을 찬미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 섬세하신 비아냥거리는 중이다 감독이 영화제 뒤풀이에서 다른 감독의 가슴을 만졌다는 기사가 났다. 피해자가 포스터로 머리를 때렸지만 주변 사람들이 발견하고 말릴 때까지도 취한 채로 달겨들어 있었다 했다. 감독은 폭로에 즉시 사죄하고 싶다는 뜻과 함께 자숙하겠다고 밝혔다. 그 기사를 읽고 내 머릿속에 문득 들었던 생각이 진짜로 끔찍했는데 한 번 들어볼 텐가.

    

 ‘...그래도 강간은 아니었네.’



 이미 그해 초부터 이윤택, 조재현, 박유천 등이 강간 또는 강간미수로 라이징스타 비꼬는 중이다 가 된 후였으므로 상대적으로 성추행이 미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지경이었다. 괴이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뒤로도 많은 영화, 드라마, 노래들을 우리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워나가야 했다. 친구 J는 한쪽 벽을 그득 채운 믹키유천의 굿즈를 들고 분이 나 어쩔 줄 몰랐고, 우리는 그걸 두고두고 놀려댔다.

  “어, 이게 누구야 믹키유천 팬 아니야.”

  그리고 놀려댔던 친구들 중 K는 강지환과 결혼할 거라고 노래를 불렀던 애였으므로, 그의 강간, 추행 사건 이후 타겟이 바뀌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놀리다 보면 안 까이는 존재가 없었다.

  “지는, 쏜애플 좋아했던 게!***”

  이런 일갈을 듣고 할 말을 잃는 걸 보면서 다같이 씁쓸하게 깔깔 웃는 식이었다.    


                                                                  ◆


  “야~이런 신용불량사회가 어디 있냐? 너만은 다를 거라 믿었건만.”

  가을방학 정바비의 휴대폰에서 전 연인에게 약 먹이고 찍은 불법촬영물 증거가 나왔다는 기사에 J가 탄식했다.

  “아니, 난 이제 이경영 방송 나오는 거 가지고도 뭐라 안 해, 우디 앨런이나 홍상수가 맨날 지 같은 영화만 찍어도 실망 안 하잖아? 우리가 안전하고 무해하다고 기댔던 사람들을 하나씩 버려야 되니까 배신감이 드는 거야. 신뢰의 하한선 날로 깨지고, 오늘도 인류애를 잃어갑니다. 아멘!”     

 

  기댔는지, 기대했는지.

  내 자아 한 구석을 차지하기를 허한 작품들은 하나같이 반짝거렸고, 그러니 그 작품을 만든 이들 역시 내 기준선 아래로는 곤두박질치지 않기를 염원하게 된다. 하지만 바람은 종종 실패했다. 왜냐하면 김문수 같은 소위 열혈 빨갱이도 극우 보수가 되는 세상이고, 그게 변절(?)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 애초부터 수만 가지 모순을 동시에 끌어안고 사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지! 사람을 탓하는 건 아니다만, 솔직히 아쉽고 슬플 적은 있다.     

   그래도, 우리는 신뢰의 하한선을 깨면 깼지 신뢰의 기준을 왜곡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 정도는 봐 주자 하고 들어도 그만일 노래를 굳이 끄기로 했다. 그날까지만 아까워하고 다음날이면 더 아름다운 작품과 사람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곁에 두기로 결심한 것들로 채워지니까.


  김보라^와 이옥섭^^을 찾아 읽고, 임대형^^^을 발견해낸다. 케빈스페이시+를 더 이상 아끼지 않고 조셉고든레빗++을 귀여워하기로 한다. 노벨문학상에 노미네이트 됐다던 묵중하고 비열한 고은+++의 줄글 대신 이슬아의 경쾌하고 맑은 언어를 쌓는다. 어제의 무지를 인정하고 노력할 줄 아는 김윤석++++의 작품에 애정을 보낸다.   

  

  쥐어버린 권력을 쓰지 않기란 꽤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태도 아닐까. 네 사람 앞에 케이크가 세 조각 남았을 때, ‘이 중 누군가가 그냥 케이크를 포기해버리게 만들어선 안 된다’고 타이르는 제인처럼.    

제인이 했던 강렬한 대사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오늘 우리가 기대기로 한 아름다운 누군가에게 내일은 실망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높은 확률로 실망하게 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다. 괜찮다, 그런 가능성에 지지 않을 자신있다. 이건 더 아름다운 이름과 언어들을 정성스레 길어올리는 과정이다. 그렇게 2021년의 우리는 신용의 하한선을 낮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높여가는 중이라고, 그렇게 말해 보면 어떨까.     





 * 구조조정이 한창인 쇠락하는 조선업의 도시 거제에서 '땐'스 스'뽀'츠를 추는 여성 청소년들이 만들어가는 성장 드라마를 담은 KBS스페셜 다큐

** 2021년 1월 11일.

*** 2016년 “음악에서 자궁냄새가 나면 듣기 싫어진다”, “이 사람도 자궁 냄새 심하게 난데이”등의 발언을 했던 일이 논란된 바 있다.


^ 영화 ‘벌새’의 감독

^^ 영화 ‘메기’의 감독

^^^ 영화 ‘윤희에게’의 감독


+2017년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논란된 바 있다.

++ 헐리우드에서 성평등을 주창하는 대표적인 배우 중 한 명

+++ 문인계 후배 성추행으로 논란, 2019년 최영미 시인에 명예훼손 소송을 했으나 2심까지 패소했다.

++++ 2016년 영화 기자간담회에서 공약으로 ‘여배우 무릎에 덮은 담요를 내리겠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으나 그 이후 사과하고 팬들이 선물한 성인지감수성 관련 도서를 읽어나가며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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