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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Apr 29. 2021

"이해가 안 되면, 외워"

전교조 계간지 <우리 아이들> 봄편에 실은 일상 속 성인지감수성 이야기2

작년에는 아웃박스의 성평등 수업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었습니다. 올해 이어가게 되면서 무슨 글로 마음을 전하면 좋을까 고민했습니다. 올해는 아웃박스 소속 교사가 아니라 시민 개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성인지감수성에 관해 고민하고 사는 일상을 가볍고 산뜻하게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우리 집에서 자주 사용하는 관용표현 중 하나다. 가족 넷이 전부 자기주장 강하고 파워 고집쟁이이다보니 발생했다. 아빠는 치약을 아무렇게나 짜는 걸 너무 싫어했고, 나는 치약의 통통한 부분을 짜는 걸 좋아했다. 중간이 쪼그라든 치약을 보고 성이 난 아부지가 뒤에서부터 짜라고 잔소리하면 “왜 그래야 해요 대체? 그게 안 돼 있으면 왜 화가 나? 이해가 안 돼.”하고 대꾸를 했고, 그럴 때 돌아오는 답은 정해져 있다.

“이해가 안 되면, 외-워.”      


한때 우리 네 가족은 잠시 모여 살았다. 어느날 엄마 아들이 아침에 출근할 생각 없이 그지꼴로 디비져 있길래 물었다.

니 왜 출근 안 하냐?         /   나 퇴사함.

읭, 갑자기..? 왜?            /   남미 좀 갈라고 한 4-5개월 정도? 

미쳤네 이게... 언제 가는데?   /   내일.     


인생 참 스펙터클하네.. 어쩔라고 저래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어... 하고 낮게 읊조리면 엄마가 귓속말로 그랬다. “이해가 안 되면, 외워 고운아... 저게 쟤야.”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좀 폭력적으로 들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쓰이기도 쉬운 말 맞다만, 고집 센 우리 가족에겐 이런 의미다.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생각을 바꾸라고그게 제일 쉽다고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려면 물론 이해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그게 당장 어려우면 그냥 그렇구나~’하고 외워 놓자는 거다왜, 수학도 선행학습하면 인수분해니 함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도 일단 식 다 외워서 문제 풀어대고, 어느 시점 가면 저절로 이해되는 때가 오니까, 그때 공식 외웠던 게 도움이 되니까.     




이 말을 내가 처음으로 쓰게 된 때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 말을 꺼냈다.


추운 겨울날 종로에 놀러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졸았다. 사실 졸았다기보단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게 더 적절하다. 두통 때문에 속으로 끙끙 앓는 중이었다. 목적지 근처에 다 왔는데, 요상한 인기척이 났다. 오른쪽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데 오른쪽 좌석 뒤에서 손이 나와서 내 가슴을 더듬더듬거리는 거다. 다행히 겨울이라 두툼한 터틀넥 아래로 두 겹이나 더 껴 입었었고, 외투 중 가장 두꺼운 코트를 입고 있어서 강렬(?)하게 만져지진 않았지만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흘러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느낌은 아직 생생하다.     


창에 기댔던 머리를 떼고 그 손이 소스라치며 거두어지는 동안 뭐라고 할지 고민했다. 나 안 자거든 시X롬아? 어머머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어딜 만져요?! 그런데 야속하게도 이런 생각도 따라왔다. 지금 일부러 만진 게 맞나? 실수하신 건 아닌가? 소리쳤는데 잡아떼면 뭐라 하지? 여기 CCTV 있나? 그런 고민을 하다 소리칠 타이밍을 놓친 20대 중반의 여자애는 점점 배짱을 잃었고, 도착지에서 일어나 그자를 째려보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그는 족히 50대 이상 되어보이는 작달막한 아저씨였고, 왼쪽 좌석에 올려둔 가방 옆 쇼핑백엔 NAIN*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 만한 딸이 있나 보지.

*여성복 쇼핑몰

그자에게 무엇도 하지 못한 게 내내 분해서 씩씩거리고 버스를 갈아타 집에 도착했다. 화를 내려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가족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 품에 안겨서 사정을 설명하면서 펑펑 울었다. 이때 안타까움을 느낀 아부지가 츤데레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그만, 이렇게 대꾸하고 마는데...

“그러니까 누가 기집애가 11시 넘어 들어오래? 일찍 다녔어야지.”

(이마짚) 아, 아부지...!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그 말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푯말이 되어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콕 박혀 있다. 안타까움이 아버지의 본심이라는 것과 별개로. 


    


그로부터 반 년쯤 지났나, TV에서 성범죄 관련 뉴스가 뜨니까 엄마가 세상이 흉흉하다고 나한테 호루라기라도 갖고 다니라고 하셨다.

“엄마, 호루라기 당연히 갖고 다녀. 근데 저런 뉴스 보면서 나한테 조심하라고 하는 건 잘못하면 성범죄 일어나는 게 피해자 탓이라고 하는 말이 돼요.”

어른한테 대드는 꼴 못 보는 아부지가 대신 대답하셨다.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별 소리를 다 한다. 미친놈 막을 수 없으니 대비하라는 게 그렇게 아니꼽냐.”     

“그런 말들이 미친놈한테 면죄부를 주니까 하는 말이죠. 막을 수나 있나요? 우리나라에서 강간 같은 강력범죄 빼고 성범죄가 제일 많이 일어나는 장소가 어딘지 아세요? 버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이에요, 제일 많이 일어나는 시간대는 5시에서 7시반, 그러니까 사람들 버젓이 다니는 퇴근 시간대고. 그뿐이냐? 성범죄자들을 인터뷰해 보니 높은 비율로 그들이 미친 게 아니라...” 

약 3분을 넘도록 나는 조사했던 통계를 줄줄이 읊었고, 할말이 없어진 아부지는 비아냥 조로 응대하기로 한다.

“대~단한 여성운동가 하나 납셨네. 너 지금 통진당 이정희 같아, 그만해! 바락바락 독기가 장난 아냐.”

아빠 입장에선 최상급의 욕...

그 말이 내게 타격을 줄 거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아부지가 독설을 날리는 건 위기감을 느꼈단 의미다. 나이스!

“누굴 닮아서 저래, 궁시렁 궁시렁...”


바로 지금이다복수(?)할 기회.

“아빠, 이해가 안 되면, 외-워. 성추행은 누구 문제다? 저지르는 사람 문제다~ 딸은 누구다? 통진당 이정희다~!”

그 말에 아빠는 반쯤 푸르락했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버리셨다.     



아빤 정말로 자주 외어야 했다. 그 날 이후, 딸과 이런 이슈로 허구헌날 부딪쳤다. 그때마다 아래와 같은 말들을 외어야 했다. 외모평가는 무례하다, 결혼 안 한 직원한테 결혼 언제 하냐고 묻는 거 아니다, 조카한테도 안 된다, 김지은은 꽃뱀이 아니다, 운전 못하는 사람 보고 ‘저거 김여사지’ 하시는 거 혐오표현이다...

열심히 외운다고 전부 이해로 바뀌는 건 아니다. 어떤 건 여전히 외우는 데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암기가 이해의 전 단계라는 걸 알고 있으니, 여유롭게 기다리며 때로 아옹다옹 토론하며, 우리 가족은 잘 지내고 있다. 싸우지 않는 게 평화가 아니라, 이런 게 평화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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