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계간지 <우리 아이들> 봄편에 실은 일상 속 성인지감수성 이야기1
(소개글에 넣은 멘트) 작년에는 아웃박스의 성평등 수업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했었습니다. 올해 이어가게 되면서 무슨 글로 마음을 전하면 좋을까 고민했습니다. 올해는 아웃박스 소속 교사가 아니라 시민 개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성인지감수성에 관해 고민하고 사는 일상을 가볍고 산뜻하게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얘가 게이들이 꼬이는 얼굴이지.”
삼사 년쯤 전이었던가, 독서모임 뒤풀이에서 영화‘브로크백 마운틴’ 얘기를 나누다가 이런 농담을 시작으로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대화가 오가고 친구들은 몇 번 웃음을 터뜨렸다. 당시의 내가 얼마나 융통성이 없었는지, 씁쓸한 미소를 짓다 말고 이렇게 대꾸했다.
“통상 5~15%로 성소수자 인구를 추산하고, 우리나라 특성 생각해서 아주 보수적으로 잡아도 이 중 1명 이상은 성소수잔데, 우리 대화를 게이 친구가 들었으면 어떻게 느낄지 생각해 봤음 좋겠고...(후략)”
친구들의 농담을 제지해 본 첫 경험이었다. 떨었다. 당연히 잠시 동안 분위기는 싸-해졌고 나도 찝찝했다. 나중에는 그때의 내 뻣뻣함까지 놀림의 대상이 되어버릴 만큼 서툴렀다.
이제 그 뻣뻣한 프로불편러는 능숙하고 능글맞은 프로불편러로 진화했다. 낄끼빠빠를 잘하고 적당히 웃어넘기고 결정적일 때 문제제기하는 법을 배웠다. 꾸준한 연습과 실천, 실패와 개선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말 안 통하는 메갈 꼴페미들도 많은데 저 정도면 합리적인 페미지’에서 합리적인 페미를 맡고 있다. 성인지감수성 교육하는 교사로 강의를 시작한 지 햇수로 5년째에 접어들었다. 이전에 웃고 떠들었던 농담과 개그들이 누군가에겐 불편함을 넘어 괴로움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반성하고 내 안일한 사고를 깨기 위해 애썼다. 그 낯선 수용의 과정이 재미있기도 했다.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이제는 웬만큼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상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렵사리 쌓은 ‘상식인으로서의 명성(?)’이 자리 잡아갈수록 나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바로 ‘빻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남자들 얼평, 몸평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남 까는 개그가 얼마나 웃긴데... 친구들 키, 턱, 어깨, 눈, 가슴, 뱃살, 다리 길이 등등 아무튼 외모 콤플렉스 콕 찝어 놀리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운동할 때 박재범 ‘몸매’ 랑 씨스타 ‘가식걸’ 들으면서 파워워킹하면 얼마나 신나는데...‘옷 못 입는다’ 보다 ‘패션고자’라고 해야 말맛이 더 사는데... 데이트폭력 키스신이 어떻고 저떻고 해도 드라마 <또오해영> 재방송 얼마나 재밌는데... 까칠하게 구는 친구한테 그날이냐고 놀리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이젠 아무 것도 못 하고 못 듣고 못 본다. 휴...
*빻다: 가루로 만들려고 찧다. 경상도 사투리에서 온 ‘부서졌다’의 다른말이라고 하기도 한다. 못생긴 외모를 비하할 때 주로 쓰던 표현이었으나 널리 퍼지는 과정에서 확대되어 차별적이거나 정치적 올바름에 어긋난 언행을 비난할 때 쓰이기도 한다.
절반쯤 농담이고 절반쯤 진심이다. 때로는 정말 나 같은 프로불편러들 때문에 불편한 감정이 든다. ‘~성애자, ~밍아웃’ 같은 표현들도 어떤 맥락을 지우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지점에서 불편한지 이해했고 더 이상 쓰진 않지만, 이만큼 의미를 빠르게 전달하는 밈이 달리 없을 때는 머릿속에 뿅하고 떠오르곤 한다. 소올직히는 쓰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울 때도 있다. 사투리 관련해 불쾌한 에피소드가 유난히 많았던 부산 친구 C는 ‘너낌, 머선129, 슨생님, 서타일, 서윗하네’같이 사투리를 개그 코드로 쓰는 것도 불편하다고 했고, 이를 들은 다른 친구 K가 그 표현들을 쓰지 않으려고 애쓰는 걸 봤다. 오늘 읽은 경향신문 칼럼*에서 이진송 씨는 촉감 게임 (눈 감고 만져서 무슨 물건인지 맞히는 놀이, 아웃박스에서도 성교육 행사 때 자주 썼던 수업 열기 활동이었다) 에 관해 ‘평소에는 촉각으로 판단할 필요 없고 상자 속 물건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즐거운 게임이다’고서술했다. 앗차 싶으면서도, 완전히 납득하기 전까지는 이런 물음들이 머릿속에 이어진다. ‘이것까지? 이렇게까지?’
* <미묘하고 애매한... 예능 속 ‘장애 희화화’>, 경향신문 토요판 (2021.01.15.)
‘나름 생각할 줄 아는 상식인인 나를 지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반발심이 이는’시간이 지나고 나면 머릿속에 들어야 하는 물음이 ‘그럼 어떻게 바꿔야 하지? 어떻게 해야 무해하면서도 한껏 웃길 수 있지?’라는 걸 안다. 그리고 이내 그런 것들을 발견해낸다. 장도연 같은 인물이 주는 웃음, 그러니까 말하자면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샘솟는 개그, 윤스테이 같은 프로그램이 주는 평화로운 웃음, 이미 비슷한 이해 기반이 갖춰진 친구들 사이에서 길티플레저처럼 아슬하게 빻은 표현을 쓰고 그 ‘재치’에 다같이 빵 터지는 순간 같은 것.
하지만 솔직히는- 대부분의 나는 그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드는 불편함’들보다 조금 늦게, 늘 멱살 잡혀 끌려간다. 어-쩔-수-없-이- 말이다. 불만은 없다. 세상은 언제나 호의적으로 모든 걸 베풀지 않고 선택을 요구하니까. 덜 불편하고 덜 재밌는 세상에 살기로 결정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불편해진 세상에 불만을 토로하는 게 아니라 그 세상에서 더욱 재밌게 지낼 방법을 궁리해내는 것일 테니까.
안녕, 나의 빻음이여. (허세 부리며, 그러나 미련 터지게)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