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을 트레바리에서 함께 읽고
*2018년 트레바리 국경 독서토론 도서.
현대사회의 다양한 기준에는 이미 규범화된 관습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성역할, 고귀함/비천함을 가르는 기준, 계급을 나누는 일, 가치있는 재화/하찮은 재화를 구분하는 방식 모두에. 그 관습이 형성되고 전파되는 과정에 경쟁, 약탈 그리고 그를 이용한 우월감 과시, 낭비가 있다. (여가, 소비, 의복, 사상, 도박성, 종교, 고등학문...그의 손아귀에 잡히면 빠져나갈 수 있는 소재가 없다ㅋㅋ) 교묘한 이 과정이 오랜 시간에 걸쳐 공고한 사실로 자리잡으면 노동이 비루한 것이 되고, 유용을 위한 소비는 모양 빠지는 것이 된다. 어떤 차이가 계급을 나누고 차별로 굳어가는 과정을 지나치리만치 여러 번, 자세한 사례를 통해 설명해준다. 그 설명은 생물학적, 인류학적 접근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데 지식이 부족하여 그가 다루는 논리에 이러한 접근이 얼마나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때때로 뜨끔하고 여러 번 분노했다. 나는 어떤 때는 힘없는 노동자계급이었고, 어떤 때는 생계 때문에 여력이 없는 집단을 위해 대신 목소리 낼 수 있는 유한계급이었다. 어떤 때는 가장 싼 물건부터 살펴보는 비천한 인간이었다가, 어떤 때는 0 하나 더 붙어야 선물할 때 간지가 난다고 생각하는 과시적 인간이었다. 가는 허리를 선망하고 불편한 옷을 감수하는 대리여가의 삶에 스스로 적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책 말미에서 소개하는 '신여성 운동'을 교육분야에서 일로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구조는 사회와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틀이지만,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개인은 구조 안에서 하나의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현대의 개인 안에는 여러가지 정체성이 혼재하고 있다. 에센스가 뚜렷하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론 중첩되게 때론 성기게 자신을 정체화하고 표현한다. 현재 한국의 주류 사회구조는 이런 개인들을 충분하게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베블런은 이런 사회구조 변화의 키를 제도가 쥐고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이미 받아들인 관점을 뒤집거나 억제하긴 어렵고, 변하는 환경에 따라 제도와 관습도 바꾸고 적응해야 하는데 사회 구성원 개개의 자유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그러니 '깨어나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유한계급은 어떤 인간집단이 아니라 제도, 관습, 사회적인 족쇄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깨어난) 인간들이 그 족쇄를 박차고 나오길 기대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베블런과 좀 다르게 나는 제도가 시민 문화를 뒤따라온다고 생각한다. 지난 촛불혁명이, 어제의 지방선거가 말해준다. 변화의 바람을 목격한 사람들은 더 큰 발전을 꿈꾸고 결국 일구어낼 것이다. 제도가 그 속도를 앞지르긴커녕 맞춰 따라올 수 있을까 걱정해야 할 게다. 거대한 흐름을 키우는 것도 깨고 바꾸는 것도 우리에게 달렸다.
익숙해진 관습을 바꾸고 제도의 발전을 꾀하는 문화를 구성해가는 건 결국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대화를 지속하게 만들어주는 트레바리는 짱이다...(?)
덧. 관심사가 관심사다 보니, '여성'과 '남성'이라고 명시한 부분의 이야기들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베블런이 일부러 사람을 people, human, mankind라고 구분해 불렀기에 오해의 여지가 적었다고 추정한다면, 이 책에는 성별과 지위의 관계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 관습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 재밌었다(?). 출산기능이 있는 여성은 전리품으로 유용했다든가, 과시적 여가의 끝판왕이 매력적인 트로피와이프인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들이 그렇다. 토론해보니 대부분 여기서 불쾌감을 강하게 느끼셨는데 사실이 아니어서 그렇다는 건지 베블런의 의견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는 물어보지 못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