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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Aug 16. 2017

좋은 관계의 준비물은 좋은 나

<사랑의 기술>을 읽다가 떠올린 생각

초딩 때였나, 티비를 보다가 엄마한테 사랑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엄마는 사과를 깎다 말고 들어보이며 "이렇게 고운이한테 사과가 있으면 반으로 쪼개서 나눠주는 게 사랑이야" 하셨다. 그 대답이 실없어 웃고 말았는데, 어쩐 일인지 사랑이 뭐냐는 질문이 나오면 그 실없는 대답이 먼저 떠오른다. '이런 게 사랑이구나' 싶을 땐 그 말이 마지막 퍼즐조각처럼 꼭 맞아들어가는 거다.

바람직한 '나눔'의 아이콘 삼둥이


내 물건 살 때는 가격을 따지는데 선물을 할 때는 품질을 따지는 경험들을 해봤을 것이다. 받으면 고맙지만 동시에 약간 미안하거나 빚지는 듯한 마음이 들고, 주는 건 어쨌거나 홀가분하고 기분 좋기만 하니까 나는 주는 게 훨씬 쉬운 거라고 생각했다, 이 구절을 읽기 전까지.


생산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의 경우에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나는 나의 힘과 부와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는 것은 나를 희열로 가득 채워준다. 나는 자신을, 충만되어 있고 소비하고 살아 있는, 따라서 즐거워하는 자로 경험한다.(p.50)


'진정으로' 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는 게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면 더욱 그렇다. 사랑도 역시 균등한 가치 교환의 대상이 된 사회에서, 상대도 나 같은 마음일 거라는 희망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나를 내던지는 행위는 확신해야만 할 수 있다. 사랑한다는 행위와, 그 행위를 하게 한 신념과 용기를, 그 주체인 자신을.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아낌없이 줄 수 있고, 그때 비로소 사랑 받을 준비가 되는 것인데, 많은 이들은 사랑을 하고자 할 때 불안해한다. 충분히 굵은 줄에 몸을 매고서도 안전함을 믿지 못해 발을 차마 떼지 못하는 번지점프 체험자처럼. 사랑을 받으면 주겠다는 태도로 자신의 유약함을 숨기고, 마침내 사랑을 받았을 때도 '한 번만 더'를 반복하며 의심한다.


진정으로 주지 못했던 아픈 순간들이 생각난다. 사랑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나 대신 사랑받을 자격 없는 상대를 쉽게 탓하며 지나왔던 시간들. 애인이나 가족에게, 학생에게, 집단에, 정치인에게, 범죄자에게, 사회에. 내가 어떤 때 건강한 신념을 잃는지,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어떻게 합리화하는지, 어떻게 비겁해지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것보다 상대가 그런 대접 받을 만했다고 탓해버리는 게 훨씬 편하기 때문이었겠다.


그런데 그런 게으름으로 내안의 나를 무기력하게 오래 두면 내 삶은 전반적으로 말라버린다. 사랑이 어떤 한 사람과의 감정이 아니라 생에서 맞닥뜨리는 대상 전반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창이나 동료 간 관계에 약간의 염증을 느끼고, 교직이 천직이 아닌가보다 하는 고민을 하고, 가진 것도 많은 내 외모에 서슴없는 비하를 하고 있었던 그 때를 달리 말하면, 그때 나는 사랑을 잘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주는 기쁨, 자신에 대한 확신, 내딛는 용기, 생산적인 태도'라고 이제는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사랑할 줄 아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그러고 나니 이 '열심인 태도'가 삶에 물감 퍼지듯 다. 주변 사람들에게 애정과 끈기로 다가가게 되고, 학교에서 나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 생겨나 출근이 즐겁고, 있는 그대로의 나도 예뻐해주면서 더 멋져지자고 욕심도 내게 된다. 좋은 일엔 진심으로 기뻐하게 되고 약해서 악해진 사람들에겐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헌데 이 같은 변화는 사실 내게로 향한 내 주변의 끈덕진 사랑이 없었다면 배울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역시 사랑은 안고 보듬고 갈등 겪어가며 같이 하는 것이 제맛이라.


그러니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던 엄마 말이 역시 맞는다는 실없는 결론.

사랑해요. 사랑합시다!




독서모임 트레바리 GD의 9번째 토론 도서 <사랑의 기술> 독후감입니다. '트레바리'는 독서모임 기반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에요. 9-12월 시즌 모집중이랍니다! 함께 지적인 대화, 온기있는 관계 만들어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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