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파프리카는 비빔국수 고명으로 올리지 않습니다.
부끄럽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내 손으로 내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빠랑 남동생이랑 살 때는 퇴근 시간도 각자 다르고, 꼭 같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각자의 끼니는 각자 알아서 ‘때우기’ 일쑤였다. 게다가 요리라곤 볶음밥이나 파스타, 샐러드가 전부였던 내가 내 집에서 내 밥을 차리다니. 볶음밥과 파스타와 샐러드의 토핑을 잘 고르는 게 요리를 잘하는 것은 아니란 걸 몰랐던 겁 없는 새내기 주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겁이 없으면 용감해질 수 있다는 걸 아시는지. 처음엔 알 수 없는 자신감에 블로그만 대충 살펴보고 요리를 했다. 대부분은 그저 그랬지만 먹을 만했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졌다. 저녁으로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었는데, 남편이 국수를 몇 젓가락 먹다 말고 구토를 하러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나 맛이 없었니. 맛없는 음식을 먹었을 때 보통 과격한 표현으로 ‘토할 것 같아’라고 말하지만 그걸 내가 한 음식을 먹고 몸소 표현해주기까지 하다니. 걱정도 되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꽤 큰 충격이었다. 알고 보니 남편은 이미 속이 좋지 않았던 상태에서 본인이 싫어하는 파프리카가 고명으로 소복이 올라간 비빔국수를 먹자 속이 뒤틀렸다고 해명했으나 이미 나는 깊은 상처를 받은 뒤였다.
구토 사건이 일어난 며칠 뒤,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그만 내려 두고 <진짜 기본 요리책>을 샀다. 초심으로 돌아가 기본기부터 착실히 쌓아보자 다짐하게 되는 제목의 책이었다. 역시 공부는 책을 보면서 하는 거라고 우쭐대던 당시의 내가 기억나 피식 웃음이 난다. 생각해 보니 거의 요리를 해 보지 않았던 내가 대체 왜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건지는 아직도 미지수지만, 충격의 비빔국수 덕분에 진짜 요리다운 요리를 시작해 볼 수 있었으니, 비빔국수는 나의 요리실력의 현주소를 알게 해 준 고마운(?) 메뉴로 남아있다. 파프리카는 더 이상 비빔국수 고명으로 올리지 않는다.
책을 보며 기초부터 다시 차근차근 요리를 시작하고 흥미를 붙이기 시작한 지가 벌써 3년 반이 넘었다. 야무지고 싶은 손끝이지만 여전히 컵을 깨고 살을 썰며 종횡무진 부엌을 누빈다. 이유는 여전히 요리가 좋기 때문이고, 할수록 더 좋아지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먼저 집 정리를 한 뒤, 그다음으로 정성을 들인 일은 나에게 밥을 지어 먹이는 일이었다. 쌀을 불려 갖은 채소를 얹은 뒤 솥밥을 짓고, 시간을 들여 육수를 내 국을 끓였다. 회사에 다닐 때엔 물리적인 에너지가 부족해 들일 수 없는 정성을 다시 내게 들였다. 밥 다운 밥을 먹으니 힘이 났고, 잘 안 쉬어지던 숨이 다시 편안히 쉬어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내가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고, 근사한 요리를 만들면 나도, 내 삶도 약간 더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길이 정해지지 않은 지금이 막막하고 두렵긴 하다. 솔직히 이 시간이 이렇게나 길어질 줄도 몰랐다. 그치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멈춰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은 내 인생에서 꼭 가져야 했던 시간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가졌을 이 시간과 이 기회가 몹시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의 인생에서 이 멈춤의 시간은 한 길을 고집하던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 지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나는 아직 그 시간 위를 걷고 있고 조금 더 가 봐야 하겠지만, 중요한 건 다른 나를 상상하고 다시 새로운 나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맨날 상상하던 길 말고 조금 다른 길, 조금 더 나 다운 길을 상상할 수 있게 된 지금의 내가 더 좋기에, 나는 오늘도 밥을 짓고, 글을 지으며 다시 나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