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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iphany Dec 27. 2022

무엇이 예술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

파리 여행에서 돌아와서

파리 여행을 위해 항공편/숙소를 예약하고는 조금의 공부를 하기로 했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파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술작품과 작가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가야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어차피 오르세, 오랑주리, 루브르에서 모든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 책이나 강의에서 알려주는 ‘루브르에서 꼭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 20선’ ‘ 오르세에서 알차게 보내는 2시간’에서의 가이드를 따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책이나 강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꽤나 재미있었다. 인상주의, 신고전주의 등 예술 사조를 배우고 시대별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작품과 작가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어렴풋이 알고 있던  주제가 나올 때면 반갑기도 했고, 처음 접하는 부분을 알게 될 때는 지적 허기가 채워지는 만족감도 있었다. 틈틈이 메모도 해가며 정리하다 보니 이제 파리에 가서 어떤 작품을 찾아봐야 할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이제 어느 정도는 준비가 되었으니 동선만 잘 짜면 되겠다!’ 라고 생각하고 미술관에 도착했는데 아래와 같은 상황에 당면했다.


첫 번째. 보고 싶었던 작품을 마주해도 기대한 만큼의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나도 누군가처럼 작품 앞에서 발을 뗄 수 없을 만큼의 전율을 느끼기를 기대했었는데, 솔직히 그러지 못했다. 한 예로 인상주의 대표 화가 모네가 자신의 죽어가는 아내를 그린 작품 ‘까미유의 임종’을 보고 누군가는 빠른 붓터치에 점차 소멸해 가는 사람의 모습에 눈물이 나기도 한다는 데, 예술을 보는 예리함이 부족해서인지 나는 그런 격한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도 조금 당혹스러웠다.


두 번째. 어디를 가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작품들 속에서 ‘꼭 봐야 할 작품’들만 쏙쏙 골라서 본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지도를 보지 않더라도 인파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찾고 있던 그 작품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쉬웠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리스트(‘추천 목록’)에 있는 작품 외 대다수의 작품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쳐야 하는 데, 그것은 ‘예술을 편견 없이 감상하는 사람’ 이 되고 싶은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예술에 있어서도 권위 있는 기관의 평가를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세 번째. 수많은 작품 중 50cm 정도의 조그마한 모나리자 앞에서 길게 늘어진 줄에 서 있다 문득 든 생각 - 사실 예술 작품에는 객관적인 가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지금 내가 ‘감상’이라고 믿는 것 조차 관광/미술 업계에서 상업적으로 고안해 낸 우아한 소비 행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다시피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는 i) 이탈리아의 천재 작가 다빈치의 작품이라고 공인된 몇 안 되는 작품(14점?) 중 하나이기 때문이며 ii) 우연한 도난 사건을 계기로 작품에 대한 미스터리한 ‘서사’가 더해져 화제성을 띄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의 생각은 i) 그렇다면 작품은 ‘작가’를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즉 ‘작가’에 대한 당대 평가에 따라 ‘작품’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며) ii) 예술성과는 무관한 우연한 사건 (여기서는 ‘도난’)에 의해 가치가 달라지듯 작품의 가치는 고정 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예술 작품의 탁월함은 존재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생각나는 몇 가지를(사실과 더 가까운 모사/색감/실험적 기법/작가의 메시지/작가의 삶 등등) 나열해봐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항상 예외가 생겼고, 모든 탁월함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준을 찾기 어려웠다.

어떤 예술가/작품이 다른 예술가/작품보다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어떤 예술가/작품이 다른 그것보다 더 탁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모든 작품이 그 나름의 가치가 있겠지만 그 가치가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거나 평가 불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탁월함은 아래의 요소로 결정되는 것 같다.


1. 작가의 의지 - 작가의 깊은 사유와 통찰이 > 의지가 되어 > 작품을 통해 감상자에게 울림을 준다면 그 작품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작가의 의지의 산물이다.  반고흐가 동생 테오로부터 조카 탄생의 소식을 듣고 그 기쁨을 표현한 <Almond blossom>의 가치가 단순히 그 색상과 표현기법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던 농촌에서의 노동 현장을 그린 밀레의 작품을, 노동을 통해 삶의 의지를 표현하고자 한 그의 ‘의지’를 빼놓고는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인상주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큐비즘의 피카소, 신조형주의를 대표하는 몬드리안, 익명의 작가 뱅크시의 작품 역시 모두 어떠한 ‘의지’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 의지는 치열하고 끈질기게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반복되는 데, 우리는 <작품>을 통해 그 <의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과 국경을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와닿는다면, 그 작품은 그렇지 못한 작품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lmond trees flower early in the spring making them a symbol of new life.
The painting was a gift for his brother Theo and sister-in-law Jo, who had just had a baby son, Vincent Willem. In the letter announcing the new arrival, Theo wrote:
‘As we told you, we’ll name him after you, and I’m making the wish that he may be as determined and as courageous as you.’

2. 감상자의 의지 - 우리의 마음 상태를 하얀 도화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어릴 적 성장 과정에서의 어떤 결핍으로 구겨진 부분이 있을 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처로 구멍이 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예술 작품을 통해 그 부분을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 내지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또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음에도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작품활동에 매진한 작가의 작품을 통해 경외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다만 이것은 가만히 작품을 보고 있다가 일어나는 마법 같은 일은 아닌데, 감상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을 때만 그 마법 같은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서 가장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선행되고 나서야 나에게 필요한 작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저 단색 하나를 채워 넣은 색종이 그 이상 그 이하의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치유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감상자 사이의 교류>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변하고 움직이고 끊임없이 반응하는 그 어떠한 것인 것이다.

Mark rothko chapel

https://www.thoughtco.com/mark-rothko-biography-414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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