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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iphany Feb 25. 2023

명품 매장에서 줄 서기

파리에서

2022년 10월 파리로 여행을 간다고 하니 주변 친구들에게 쇼핑을 후회 없이 하고 오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금액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방을 하나만 사 와도 비행기 티켓 가격을 퉁칠 만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던지 하는 등의. 명품에 큰 욕심이 없었음에도 그렇게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기회라면 놓치면 아깝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관심 있던 제품들을 찾아보고 몇 개의 쇼핑 리스트를 준비했다. 우선순위는 아니지만 기회가 된다면 구입해야겠다고 가볍게 생각하고.


정말이지 파리는 쇼핑의 도시였다. 숙소가 샹젤리제 거리 근처였는데 아침에 숙소 밖을 나서면 영업을 개시하기 전부터 사람들이 매장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쇼핑리스트를 갖고는 있었지만, 줄을 서고 싶지는 않았기에 하루 일정을 끝내고 오는 길에 사람이 적을 때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루브르 박물관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샤넬 매장에 줄이 거의 없어 보여 이때다 싶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과는 다르게 매장 안에 줄이 있었긴 했지만 내 앞으로 3팀 정도밖에 되지 않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20분을 지나 내 차례가 되었는 데 이것이 끝이 아니라 2층에 올라가 전담 직원이 올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매장을 둘러보고 있으라고 했지만 진열된 물건이 거의 없었기에 그저 멀뚱히 쇼핑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5분 정도가 지나자 프랑스 여성 직원이 내 앞으로 왔다. 그녀는 내게 원하는 제품이 있냐고 물어봤고, 내가 머릿속으로 외워온 제품 명을 말하자 손에 들고 있는 아이패드는 하나도 건드리지도 않고는 그 제품들은 재고가 없어 내일 오전에 와서 다시 확인해 보는 것을 추천하다고 말했다. 다만 본인들도 재고가 언제 들어오는지는 알 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재고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과 함께. 흠… 먼저 3-4개 정도가 되는 제품의 실시간 재고 현황을 확인하지도 않고 알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제품이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는 모르지만 내일도 이 긴 대기 시간을 거쳐 매장에 들러보라는 말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뭐 물건을 안 팔겠다는 데 어쩌겠는가… 그러려니 하고 매장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참나. 내일 할 일도 많거니와 재고가 없을 수도 있는데 뭘 믿고 또 매장에 간담. 안 사고 말지’


그러고 다음 날 나는 아침 같은 샤넬 매장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밤새 어떻게 그렇게 손바닥 뒤집기처럼 마음이 바뀌었냐 하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언제 다시 파리에 올 지 모르는데 아침에 아주 약간의 시간만 투자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뭐 그런 소비를 합리화하는^^ 생각이었다. 이 날은 심지어 매장 밖에서부터 줄을 서야 했는데, 전날과 같은 과정을 거쳐 총 1.5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문제는 줄을 서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그런 모습이 싫었다는 것이다. 혹시나 길을 지나는 사람 중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기를 바라면서. 이것은 조금 아이러니하였는데,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하면서 그 모습이 싫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아마 스스로 맹목적인 소비자(호구)가 된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인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동안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발을 돌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웃긴 사실은 그렇게 긴 시간을 기다리며 마음속으로 점점 소비의 결정을 굳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음..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뭐라도 사고 나와야겠어..!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어제와 비슷한 프랑스의 백인 여자 직원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너무나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매뉴얼에 있는 대로 파리 여행은 어떤 지, 혼자 여행 중인 지 등 간단한 스몰토크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게 원하는 제품을 물어봤고 대답을 듣고는 어제와는 다르게 아이패드로 꼼꼼히 재고를 확인했다. 그러면서 ‘네가 찾는 제품의 재고는 없어’라는 단정적인 문장은 사용하지 않고, 자꾸만 다른 색상을 내게 제안해 주었다. 결국 직접적으로 물어보니 내가 원하는 색상의 제품은 재고가 없다고 알려줬다. 대신 그녀는 뭐라도 하나는 팔아야겠다는 목표를 갖고 나와의 시간을 매우 충실히 임했다. 어제의 직원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결국 직원의 노력과 나의 보상심리가 합쳐서 거래는 이루어졌다. (다만 거래 금액이 너무 적어 마지막에는 빨리 결제를 완료하고 다음 고객을 받고 싶어 하는 직원의 분주함을 보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명품 매장은 그간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KPI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매장을 운영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선 제품은 제품을 사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만 판매한다. 반반의 확률로 매장에서 소비를 결정할 사람들이 아닌, 이미 소비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온 사람들에게. 그런 소비자들은 주로 아침 일찍부터 매장에 올 확률이 높다. 거기다 자사 제품을 들고 온다면 금상첨화. 이미 그 과정을 겪었을 테니 적은 노력으로 그들의 지갑을 열 수 있다. 그리고 혹여나 소비자가 찾는 재고가 없더라도 비슷한 제품으로라도 구매를 유도해야 한다. 이미 긴 대기시간으로 피로해진 고객의 보상심리를 활용해 긍정적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관심이 있어 들어온 이상 브랜드 로고가 적힌 쇼핑백과 함께 상품을 받는 만족감으로 피로를 잊을 수 있고, 긍정적 보상을 얻은 소비자는 추후 반복 소비를 할 수 있으니까. 이 과정은 가격이 높은 브랜드일수록 더 강화된다.


이번 경험은 순간의 보상은 실현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과정이었다. 소비가 주는 즐거움은 무시할 수 없지만, 그들이 치밀하게 설계해 둔 판에서 소비 당하기에는 놓치게 되는 것이 많았다. 다음번 여행에서는 보다 중요한 것 - 사색과 관찰에 더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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