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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진 Nov 15. 2021

남자가 자는 방에 여자가 들어가면 섹스를 원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기어이 '꽃뱀' 서사를 만들어냈다

유명 영화감독이 18년 전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주장하는 여성 A씨를 인터뷰했다. 길게 얘기 나눴다. A씨의 주장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한 여성이 '권력을 가진 남성에 성폭행을 당했어요'라 고백하면 '불순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며 온갖 더러운 서사를 갖다 붙여 온 우리 '국민들'의 특성을 너무도 잘 알았다. 국민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미지의 영역을 미리 덮고 싶었다. A씨의 '예상 반론'을 듣고 싶었다. 전화 인터뷰 치고 질문이 당초 계획보다 하나씩 늘어났다.

A씨는 외국에서 20여년 사업을 한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다. '18년 전 성폭행을 당하고 왜 현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A씨는 "사업을 시작한 지 막 2년이 된 시점이었다"라며 "'성폭행 수사'란 큰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건이 벌어진 직후 옷을 주섬주섬 챙겨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가 울었다고 한다. A씨는 내게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고 나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찰서로 뛰어갈 것 같나"라 물었다. 답하지 못했다. 수년 간 성폭행 상담소를 다닌 A씨는 자신있게 답했다. A씨는 "그러는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성폭행 당한 기억을 평생 혼자만 간직하다 죽는 여성이 많다"고 말했다.

A씨도 그들처럼 그날의 기억을 마음 속에 담아뒀다. 사건이 벌어지고 2주 동안은 B감독이 잡아 끈 오른팔이 아팠다. 2주가 지났다. A씨 몸이 '그날의 기억은 묻어두자'라는 듯 조금씩 일상을 회복했다. 어쩌면 '사업을 이어가야 한다'는 일념이 그를 사고의 기억에서 멀리 떨어뜨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깨끗히 정리하지 못한 사고는 결국 되살아나기 마련이다. 2018년 우리나라에 영화계 미투가 벌어졌다. 여러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가장 큰 화제 중 하나는 '김기덕 감독'이었다. 당시 여배우들이 김 감독에 폭행과 성희롱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A씨는 여배우들을 보며 많이 울었다고 한다. A씨는 "김 감독을 향해서는 문제제기가 활발히 이어지는데 B감독은 가면을 쓰고 요리조리 잘 피해다녔다"며 "2018년 당시에 B감독의 활동을 보며 18년 전 기억이 더 선명히 떠올라 괴로웠다"고 말했다.

결국 그날의 상처를 애써 모른채했던 A씨의 몸도 조금씩 아파왔다. 정신과약 처방이 어렵다는 외국 병원이 A씨의 상태를 보더니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했다. A씨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B감독의 사과를 받아야 했다. A씨는 우리나라 언론사 기자 몇명에 연락했다. 하지만 A씨의 사고가 기사로 전해지지는 못했다. A씨는 "내 몸이 외국에 있는 탓에 인터뷰가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국 지난해 말 귀국해서야 A씨의 외로운 '바로잡기' 싸움이 시작됐다. 귀국한 지 반년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지난 7월 B감독의 연락처를 받은 A씨는 고민 끝에 B감독에 전화했다. "바라는 건 오직 진심어린 사과"란 게 A씨의 설명이다. B감독은 성폭행이 벌어진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A씨는 B감독을 강간치상 혐의로 지난달 경찰에 고소했다.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다. 그 어떤 주장도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B감독도 A씨를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등 혐의로 맞고소했다. 조만간 무고죄로 추가 고소한다고 한다.

화를 돋운 건 '내 일 아니다'라고 무심하게 마우스를 클릭하는 누리꾼들이다. A씨와 B감독 반론 인터뷰를 다룬 기사에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댓글은 "잠들어 있는 B감독 방에 먼저 들어갔다고? 이건 좀...(이상한데)"란 글이었다. 무슨 말일까. 아마 "왜 남자가 잠든 방에 여자가 혼자 들어간 거야"라는 뜻일 것이다. 이 물음의 의도를 모르겠다. 혼자 결론 내렸는데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좀 알려달라. '왜 겁도 없이 들어갔을까. 위험한데'라 생각한 것 아닌가. '위험하다'는 건 결국 위력에 의한 성관계를 말한 셈이다. A씨는 "B감독이 먼저 방에 들어간 다음 내가 문을 두들겼는지, 아니면 B감독과 내가 함께 방을 옮겨갔는지 명확히 기억이 안난다"고 했다. 만일 B감독이 먼저 방에 들어간 후 A씨가 문을 두들겼다면 누리꾼들은 'A씨가 섹스를 원했던 거네'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B감독이 잠든 방에 여성이 혼자 들어갈 일이 없지 않겠나. 위험하게.

저 댓글이 추천을 가장 많이 받았다. 남자가 자는 방에 여자가 들어간 후 성관계를 벌였는데 여자가 원했든지, 여자가 자처한 것이란 주장이다. 가르쳐야 하는 걸까. 여성이 술이 취하도록 마시고, 짧은 치마를 입어도 다 성관계를 원해서 그런 걸까. 저 댓글이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점을 두고 우리 사회 일부 사람들은 무늬만 정상인이지 전부 잠재적 성범죄자란 생각을 했다. 성범죄를 저지른들 어쩔까. 문제시할 수도 었다. 한국 사회의 담론을 움켜쥔 사람들이 다 '여자가 섹스를 원한 거지'라며 '여성이 꽃뱀'이란 서사를 만들 거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 생각과 같은 댓글 몇개로 위안을 얻는다. 저 댓글을 쓴 사람과 추천을 누른 사람들은 생각 좀 했으면 좋겠다.

https://n.news.naver.com/article/comment/008/0004670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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