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항상 불안했다
나는 어렸을 적 있는 집 애였다. 동네 아이들은 우리 집에 오면 맛있는 걸 먹는다며 친하지도 않은데 놀러 왔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맛있는 간식을 끊임없이 내어줬다. 평소에 쓰지 않는 예쁜 쟁반과 나무 그릇에 과자가 가득했다. 남의 집에서 친구가 커다란 장난감 자동차를 못 타게 하면 우리 집에도 똑같은 장난감 자동차가 생겼다. 뭘 사달라 요구하는 법이 없는 꼬마였지만 마트에서 주방놀이 장난감에 눈을 빼앗겨 발걸음이 느려지면 엄마는 마트 카트에 그걸 실었다.
초등학생 때 선행학습이란 것도 받았다. 엄마가 동네모임에서 또래 아이들이 강남의 학원을 다닌단 얘기를 들은 탓이었다. 난 타고난 길치에 통금도 엄했는데, 학원을 다닌 이후엔 처음으로 지하철을 혼자 탔고, 밤 11시에 집에 들어왔다. 대신 또래보다 일찍 핸드폰을 갖게 돼서 좋았다. 낯설고 지루한 지하철에선 음악을 들으면 됐고 무섭고 길을 못 찾겠으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면 됐다.
나는 학급 반장자리를 좋아했고 항상 날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난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이고 싶었던 아이 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반장 자린 모범생이 아니라 잘 놀 줄 아는 아이의 차지였다. 더 이상 놀 줄 모르는 내 자리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난 반장 후보에 손을 들지 않았다. 아쉬울 틈도 없이 반장이란 소소한 감투가 가당키나 한가 싶을 정도로 점점 바빠졌다. 학원에서 더 더 윗 학년의 공부를 배워야 했고 앞서가기 위한 시간싸움이 시작됐다. 나는 모든 대회와 상장을 휩쓸었고 부모님이 공부로 날 혼낼 일은 없었다. 난 감투가 없어도, 보는 이가 없어도 성실하게 해야 하는 걸 하는 아이였다. “왜 놀고 있어?! 숙제는?”이라 물으면 “다하고 노는 거예요.”라고 당당히 말하는 아이 었다. 근데 가면 갈수록 학원의 숙제는 밥 먹는 시간을 쪼개도, 새벽까지 잠을 안자도, 지하철에 쪼그려 앉아 책을 봐도 끝나는 법이 없었다. 다하고 놀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놀러 가자고 하는 일이 없어졌다. 난 항상 방과 후 학원에 가는 애였다.
강남 학원에 있는 애들은 다 있는 집 애들이었다. 모두 핸드폰이 있고, mp3가 있고, 브랜드 책가방을 맸다. 그런데도 학원 근처 편의점에선 항상 도난 경고 전단지가 붙었다. CCTV에 찍힌 아이들은 언제나 있는 집 학원생 중 하나였다. 다 있는 집 애들 모범생이었다. 저녁이면 밥 먹을 시간이 15분인 학원생들이 편의점에 북적였다. 학원생들은 컵라면을 끓일 시간도 없어서 하나같이 삼각김밥을 입 속에 욱여넣었다. 하루는 계산대로 간 적 없는 과자가 학원생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굉장히 어설픈 도둑질을 점장님도 목격했고 곧이어 큰 소리가 났지만 큰일이 되진 않았다. 당시 난 점장님이 매우 자비롭다 여겼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난 여전히 있는 집 애였다. 운동화가 아닌 반들한 구두를 또각이며 비싼 학원과 학교를 오갔다. 있는 집 애는 독해졌다. 있는 집 애는 여유가 없어졌다. 좋은 성적과, 부모님의 지원과, 친구들이 있어도 항상 불안했다. 학원에만 가면 틱장애가 심해졌다. 틱장애가 있으면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다른 친구들한테 업신여겨지니까 혼자 검색해서 없애는 방법을 찾았다. 내게 ‘장애’란 이름의 무언가가 생겼구나 하고 무서웠지만 그것마저 온전히 내 의지로 눌러야 했다. 성적에 방해되는 것은 모조리 없어져야 했다. 시험기간이면 친구들과 대화 한번 하지 않았고 친구 때문에 수행평가 점수가 깎인다는 것은 아무리 친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들은 스승의 날이면 서랍을 열어뒀다. 숱한 봉투들이 서랍 속으로 들어갔고, 책상 위 꽃바구니들 사이엔 홍삼, 금목걸이, 백화점 화장품들이 보였다. 학교에 오는 어른들은 대부분 자식을 위한 투자라는 무리를 했다. 그 무리를 하지 않는 학부모의 아이들은 자주 맞았다. 자주 폭언을 들었다. 아이들도 나도 그런 풍경에 익숙했다.
내게 담임선생님이란 귀찮은 부탁을 하는 사람이었다. 날 예뻐했지만 항상 원하는 게 있었다. 책임도 못질 외국인 유학생을 받아놓고 내게 담당시켰다. 혹은 장애가 있는 친구의 전담을 시켰다. 봉사활동 시간을 준다는 명목이었지만 ‘선생님’의 부탁을 학생이 거절할 수 없었다. 교무실에 불려 가 선생님의 부탁을 받는 학생은 예쁨 받는 모범생이기 마련이었다. 한 번은 장애가 있는 학생과 친구가 되어 도와주라는 부탁을 받았다. 부탁으로 시작된 우정이었지만 우린 정말 친해졌다. 문제라면 친구는 부탁의 존재를 모른단 점이었다. 난 졸업할 때까지 ‘부탁’을 숨기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은 외고에 가기 위한 자기소개서에 그 친구 이야길 쓰라 했다. “쓰레기 줍기를 봉사활동 목록에 넣을 순 없지 않니.” 난 외고 면접에서 주목받았고 친구와의 우정을 연습한 그대로 읊었다. 그 부탁을 받는 게 아니었다. 다른 멋들어진 봉사활동을 했어야 했다. 쓰레기 줍기를 하다 멸종위기종 동물을 구출하기라도 했어야 했다.
어렵지 않게 들어간 외고에서 난 금싸라기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됐다. 어느 전교 1등은 전교 150등이 됐고, 어느 전교 1등은 300등이 됐다. 처음 받는 등수를 나날이 갱신하며 3년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머리가 좋은 있는 집 애들은 모두가 처음 받아보는 등수와 싸우며 매일같이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전사들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도태된 ‘유별나게 눈에 띄는 아이들’을 차별하며 즐겼다. 전쟁통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용납되고 눈에 띄지 않는 법. 더군다나 머리 좀 쓸 줄 안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괴롭힘도 똑똑했다. 신고할 수위를 넘지 않았고, 모범생의 괴롭힘은 어른들이 믿어주지 않았다. 선생님께 털어놓으면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는 마법이 일어났다. 그리고 외고의 ‘담임선생님’도 다를 바 없었다. 왕따가 생기면 친구 한 명을 붙여줬다. 그리고 그 친구 한 명도 함께 사이좋게 왕따가 되면 해결됐다. 그렇게 ‘눈에 띄는 아이들’은 눈에 띄지 않게 치워졌다. 누군가의 마음을 죽이는 일은 누군가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 그렇게 모두가 평등하게 눈에 띄는 외고생이 됐다. 모두가 뛰어나고 문제 안 일으키고 단정하고 모범적인..
날 외고로 보낸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힘들다 말해도 “전학 갈래?”란 말은 절대 하지 않는 부모님이 싫었다. 주눅 들고 외로운 학교에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이 지나면 집에서 만큼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난 외고에 왔고, 다니고 있으니까. 집에서 항상 날카롭게 날이 서있는 내게 엄마는 네가 이러니 친구가 없다 말했다. 아냐 엄마 학교에선 이러지 못해. 아빠가 직장에서 외고생인 날 자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빠는 내가 왕따란 걸 모른다. 말하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내가 외고에서 300등을 해본 적 있는지 모른다. 말하지 않았으니까. 난 도망치고 싶단 얘길 꺼내지 못했다. 내 욕심으로 공부하고 성적에 집착해놓고 날 ‘있는 집 애’로 있게 해 준 부모님을 탓하는 내가 싫어졌다. 그래서 날 괴롭혔다. 난 나밖에 괴롭힐 사람이 없었다. 몰아붙이고 자책했다. 이것밖에 못하냐 쓰레기야. 머저리야.
재수를 하게 되자 비로소 아이들은 구별됐다. 하나같이 학원을 다니고, 고급 인강을 듣고, 브랜드 샤프를 쓰던 모두 같은 ‘외고생’에서 무소속 김 아무개가, 박 아무개가 됐다. 기숙학원에서 도망친 친구가 있었다. 돈이 없어 독학하는 친구를 보았다. 성적이 안 나오면 엄마 아빠에게 맞는 친구가 있었다. 멍이 들고 방 문고리가 부서져도 별 대수가 아니라는 듯 낄낄 웃으며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 불안해서 밤마다 방안을 빙빙 도는 친구가 있었다. 여유롭게 낚시를 즐기며 아이들을 평등하게 교육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아무개는 대학에 안 가고 계획 없이 여행을 떠나고 싶다 말했다. 선망받고, 시기받던 외고생이란 이름은 아이들을 지웠다. 그곳에 더 이상 있는 집 애들은 없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대학은 마치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곳 같았다. 대학에 붙은 난 과거를 세탁하고 싶었다. 범죄자와 선생들의 폭언이 난무했던 중학교의 이름을 지우고 싶었고, 쓸데없이 고귀하게 따라붙는 외고생이란 딱지도 싫었다. 오만했던 중학교 때의 기억이 부끄러웠고, 주눅 들어 무기력하게 왕따 당했던 고등학생 때의 허물이 지긋지긋했다.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근데 난 나였다. 과거를 온전히 품고 대학생활을 했다. 대입만 끝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시험에 대한 공포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시험만 보면 손을 벌벌 떨었다. 그렇게 꿈꿨던 대학도 빨리 졸업하고 싶었다. 얼른 시험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었다. 난 신념인 것 마냥, 악착같이 듣고 싶은 강의만 들었다. 다들 학점을 챙길 때 재밌어 보이는 강의만 골라 들었다. ‘해야 하는 것’이 치가 떨리게 싫어졌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었다. 시험을 보면 건성건성 봤다. 졸면서 시험을 봐도 개의치 않았다. 졸면서 시험을 봐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단게 놀라웠다. 건성건성 해서 나온 점수면 안심됐다. 공부는 무엇보다 잘하고, 자신 있던 거고 난 공부로 먹고살겠지 했는데 제일 자신 없는 게 공부가 됐다. 열심히 안 하면 적어도 비참하진 않겠지.
- “있는 집에 사는 거 부럽다.”
- ‘이상해. 난 너무 힘들어.’
- “얼마나 힘든 사람이 많은데 배부른 소리 하네.”
- ‘맞아. 배부른 소리인걸 나도 알아. 그래서 행복하지 못한 걸까. 욕심도 많고 만족할 줄 몰라서...’
- “돈 자랑하네. 재수 없어.”
- ‘자랑한 적은 없는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그런데 난 행복하진 않았어.’
- “부모 잘 만나서 교육받고 잘 먹고 부족함 없이 키워줬는데 못해준 것만 쏙쏙 골라 기억하는구나. 참 이기적이다.”
- ‘그러게 말이야. 나도 죄송해. 고마움보다 원망만 많은 자식이라. 그런데 계속 억울하더라.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공부한 것뿐인데 그게 다 내 선택들 이래. 내가 욕심내서 공부한 거래. 어린 날의 선택이 이렇게 책임으로 돌아올 줄 몰랐단 말이야. 이왕 있는 집 애라면 하고 싶은걸 해볼걸. 막무가내로 놀면 호적 파이는 줄 알았거든.’
- “과거만 계속 후회하고 원망하지 말고 지금을 살아. 털어버려.”
- ‘맞는 얘기야. 근데 난 아직도 무섭다? 나이 먹을 대로 먹었는데도 엄마 아빠한테 사랑받지 못할까 봐 무서워. 막무가내로 산다고 호적 파이지 않는단 걸 아는데도 무서워. 이젠 미래의 나를 위해 살아야 할 텐데 난 과거의 내가 너무 안쓰러워서 두고 가기가 힘드네. 계속 위로해줘야 할 것 같고 나밖에 몰라주는데, 나밖에... 나라도 함께 있어줘야지 싶어.’
난 이제 있는 집 애가 아니다. 있는 집 어른도 아니다. 어릴 때랑 똑같이 뱀의 머리를 꿈꾼다. 세상을 염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로또 당첨을 원하고, 실력을 인정받길 갈구한다. 항상 불안하고 귀도 팔랑거린다. 그래도 난 평범한 아무개다. 무소속에 내 이름밖에 소개할 것 없는 아무개다. 난 나다. 그게 날 조금은 자유롭게 한다. 누군가 있는 집 애라 행복했냐 묻는다면 행복하지 않았다. 그럼 불행했냐 물어도 세상에 불행한 사람 천지라 차마 그러했다고 못하겠다. 단지 추억보다 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많은 게 좀 슬플 뿐이다. 나만은 나를 고생했다고 언제까지고 토닥여주고 싶다. 항상 함께 하고 싶다. 나만은 ‘있는 집 애’가 아니라 ‘사랑받고 싶었던 꼬마’를 사랑해줄 거다. 재수 없지 않아. 힘들 수도 있지. 욕심 많으면 뭐 어때. 하고 싶은 거 해도 괜찮아. 졸면서 시험 몇 번이고 봐 봤는데 세상 안 끝나더라. 많이 고생했어. 행복하길 바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