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에 대한 잔상: 진로 편
귀여운 상상을 하나 해보자.
우리는 모두 한 마리의 꿀벌이다. 어린 꿀벌들은 열심히 자신의 몸집을 키우고 날개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성체가 되면 자신의 역량을 파악하여 꿀을 얻을 꽃을 모색한다. 그리고 적당히 마음에 드는 꽃을 발견했을 때, 그 꽃을 ‘나의 꽃’으로 지정한다. 그런데 그 꽃이 생각 같지 않은 거다. 알고 보니 뿌리가 썩어 꿀이 시원찮다. 계속 보니 꽃잎도 좀 거칠거칠한 게 취향이 아니다. 그런데 더 멀리 다른 꽃을 찾으러 가기엔 용기가 나지 않는다. 다른 곳에 맘에 드는 꽃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이미 다른 꿀벌들이 점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텃세가 있을지도 모르지. 무서운 말벌들 때문에 굶어 죽을지도 몰라.
그래서 꿀벌은 안전하게 첫 번째로 선택한 꽃을 고집한다. 그리고 그 꽃에 머리를 박고 바둥거리며 꿀을 채집한다. 다른 꿀벌들도 다 어찌어찌 그날의 할당량을 채집해오니까. 어떻게 다들 그리 질 좋고 양 많은 꿀들을 채집해오는지. 부럽고 불안하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꽃에 머리를 박고 귀여운 꽁지를 실룩거리며 꿀을 채집할 이 꿀벌은 주위를 볼 수 없다. 성체가 되는 순간 서로의 밥그릇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여유가 없다. 단지 그 꽃은 갓 성체가 된 자신이 최선으로 택했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나의 꽃’이 된 곳이니 나름 괜찮은 꽃일 거라며 버티고 버틴다.
사실 이러나저러나 이 꿀벌은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어느 순간 그 꽃에 버티기 힘든 권태를 느낄지도 모르고, 더 맛있는 꿀을 먹어보고 싶을 수도 있다. 혹은 다른 꿀벌 친구가 얼굴을 처박고 있는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며 엄청나게 멋있는 꽃밭이 있다며 모험을 부추길 수도 있다. 이 꿀벌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될지, 세드엔딩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꿀벌은 분명 행복하기 위한 여행을 할 것이다.
사실 전혀 귀엽지 못한 이 꿀벌 이야기는 나와 우리의 이야기일 거다. 제목과 다른 꿀벌 이야기를 먼저 하게 되었지만 사실 이 꿀벌들은 방황하는 대학생들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대학에 들어갈 때, 정말 하고 싶은 것에 맞추어 학과를 택하는 학생들은 많지 않다. 적당히 점수에 맞추어 학과를 택하거나, 최대한 원하는 방향과 엇비슷해 보이는 과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선택에 맞추어 진로를 정한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교수님이 했던 말이 있다. 50명이 정원인 과에서 그 학과에 맞는 진로를 맞추어 중년까지 살아가는 사람은 평균적으로 1명이 될까 말까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 1명이 나겠구만. 지금의 흑역사다.
나는 원하던 학과에 갔다. 정확히는 ‘원한다고 생각했던’ 학과에 들어갔다. 정시로 넣었던 3가지 학과 중 2가지에 합격했고, 취업이 잘된다는 학과 대신 배우고 싶던 과를 택했다. 굳이 두 가지중 고른다면 배우고 싶었던 학문이었을 뿐이었다. 흥미가 있었고 실제로 나름 재밌었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꿈으로 직결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걸 간과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원하던 바와 괴리가 느껴졌다.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첫째, 직업을 나의 꿈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사실 이 학과는 주어진 선택지에서 택했던 최선이었다. 원하는 방향이 확실치 않았던 어린 나는 이 학과가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회에 나가야 할 20대 중반이 된 ‘나’가 여전히 원하는 방향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첫 대학 전공은 대개 최선책이다.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차선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우리는 원하는 바가 모호하거나 얻을 수 없을 때 착각을 한다. 이것도 뭐 괜찮지, 하고. 그런데 다시금 자신이 진짜 원했던 것을 기억해내거나 찾았을 때부터가 괴로운 거다. 괜찮아 보였던 것이 사실은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고, 계속 다른 것이 눈에 밟힐 때의 그 어중간함. 어디에도 확신을 두지 못한 채 발을 담그지 못하는 상황. 그때가 온다는 것은 참 행운과도 같다. 터무니없이 긍정적인 자기 계발서의 말 같지만 정말 그렇다. 내가 원하는 바가 생긴 그 불안한 순간부터 꿀벌의 모험은 시작된 것이다. 나만의 모험 이야기를 써나갈 순간이다.
그런데 모험 이야기엔 언제나 고난이 함께 하듯이 순탄할 리 없다. 부모님이 신경 쓰일 것이고, 다시 시작점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할 거다. 그런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후회할 것도 없다. 변덕스러운 자신을 탓할 것도 없다. 과거에 내가 어떤 선택을 했었든 간에 그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또한 지금의 자신이 원하는 길을 새로이 인지하게 된 것도 돌이킬 수 없다. 단지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은 당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덮어두고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안전한 길로 가게 되었을 때 하고 싶은 게 따로 있는 나는 그걸 버틸 재간이 있는가? 반면에 새로운 곳으로 발을 담그고 다시 생초보가 되었을 때의 생계적 불안을 버틸 만큼 나는 단단한가? 혹은 불안한 나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줄 이가 하나쯤 있는가?
당장 어느 쪽에도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뭘 해봐야지 확신이 들고 후회를 하든 하지. 하지만 매 순간 이 물음을 가슴에 품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작은 움직임, 그리고 시도와 도전. 그것들의 답을 낼 수 있도록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대학이다. 대학은 많은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꽃밭과 같다. 꽃은, 전공은 단지 꿀(지식)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매체일 뿐이다. 대학은 많은 꿀벌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꽃들의 꿀의 맛과 질에 대해 음미해보고 나의 취향을 단단하게 정립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처음 선택한 ‘나의 꽃’을 나의 운명과도 같은 삶의 터전으로 삼을지, 아니면 나의 여러 다능적인 면 중 하나로서 공부할지는 정립된 가치관에 따라 선택하기 나름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불만도 딱히 없을 수 있다. 단지 말하고 싶은 바는 첫 선택에 너무 얽매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가끔 꽃에 박고 있던 머리를 들고 하늘도 바라보고, 다른 이의 꽃도 기웃거려 보면서 간을 살살 봐보는 것도 나름의 기분전환이 되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갑작스레 찾아온 두근거림에 괜스레 불안할 수도 있겠지만 모험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하며 설레어보자. 모든 꿀벌들의 행복을 찾는 모험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