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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필삼선’ 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세상엔 말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by 이부


재수 생활은 암담했다. 해외, 국내 할 것 없이 원했던 대학에 모두 떨어진 나는 선택할 것 없이 재수를 해야 했다. 해야만 했으니까. 당시 내가 택할 수 있는 것은 해외 대학을 다시 도전하느냐, 수능을 본격적으로 준비해볼 것이냐 뿐이었다. 나는 수능 공부하는 것을 택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당시의 나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진 않았다. 나는 어렸고, 무서웠고, 해외 대학이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다. 그뿐이므로. 전교에서 노는 아이. 명문 외국어 고등학교 학생. 언제나 우수하고 바른 아이. 그 아이는 이제 이도 저도 아닌 실패자, 재수생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를 이뻐하던 아버지에게 나는 이제 집에 없는 유령과 같았다.
나는 잠귀가 매우 밝고 예민한 편인데, 아버지는 항상 새벽마다 내가 자는 모습을 빼꼼 문을 열고 잠시 바라보다가 나가곤 하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잠에서 깼다. 아마 아직도 아버진 내가 그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 그런데 내가 모든 대학에 떨어져 재수가 확정된 이후, 그때부터 아버지가 내 방문을 여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 날 아침, 새가 짹짹 댈 때까지 잠들지 못했던 날. 이불을 덮어쓰고 소리 죽여 혼자 울었다. 아, 나는 실패자구나.

‘다시 해볼래?’라고 권해도 다시 겪지 않을 재수 1년. 끔찍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꽤 성장시키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시간이었음은 분명하다. 암울하면서 오만했던 외고 생활을 청산하고, ‘무소속’으로 집에서 독학재수를 했던 이야기. 그러면서 느꼈던 여러 감정들과 변화했던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누구나 수능 대박을 꿈꾼다. 나도 그러했고, 내가 재수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던 해외대학 2차 시험에 떨어지고, 수능을 망쳤을 때에도 나는 대학에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웃기게도 모든 대학에 모조리 떨어졌을 때서야 느꼈다. 나는 항상 열심히 공부했고, 성실했고, 모범생이었고, 노력했으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보상이 오진 않더라.
수능 가채점을 마치고 혼자 밤새 끅끅대며 울고 나서 학교에 갔을 때, 반 분위기가 참으로 묘했다. 불수능에 다들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습고 부끄럽게도 안심이 되었던 것은 내가 다닌 학교의 고3 학생 80퍼센트 정도가 재수를 한다는 것이었다. 애들끼리 ‘재필삼선’이라는 말이 돌았다.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라는 뜻이다. 외고에 다니는 아이들은 실수를 했든, 원하는 성적이 안 나왔든 간에 원하는 대학의 기준이 매우 높은 편이라 재수를 정말 많이 한다. 그 당시엔 동료가 많은 것 마냥 안심이 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웃긴 일인지. 당연하게도 삼수생 또한 흔했고 나의 친구 중엔 오수생도 있었다. 당연히 원하는 기준의 대학에 붙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는 재수를 할 때 홀로 공부했다. 원래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학원이 아닌 인강을 이용하여 공부를 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재수가 확정됐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나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대치동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가라고 하니 가긴 했는데, 따닥따닥 붙어있는 비좁은 책상에 앉아 빼곡한 아이들 사이에서 수업을 들으니, 정신이 아득해지고 토기가 올라와 하루 만에 그만뒀다. 처음엔 독서실도 가보고, 독학재수학원도 알아보았으나, 극도로 예민해지고 우울해진 나는 결국 나의 작은 방에 박혀 공부하기를 택했다. 나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재수학원 혹은 기숙학원에 다니는 줄 알고 꽤나 불안해했었는데, 알고 보니 많은 아이들이 나 같은 이유로 돌고 돌다 독학을 택하더라. 다들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빡세게 공부하기 싫어서 탈출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수학원이든, 기숙학원에 들어가든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스스로가, 그리고 모두가 점점 미쳐가는 게 느껴져서 못 버티고 빠져나왔다고 털어놓았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와 재수생활에 대해 얘기했다. 그 친구는 기숙학원에서 반년 정도 지내다 나와서 독학을 했다. 처음엔 다 같이 기숙생활을 하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서로를 의지하며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줄 알았단다. 그런데 그곳은 훈훈하게 동료애를 다지는 공간이 아니었다. 친구는 가면 갈수록 불안감에 휩싸여 밤마다 방안을 빙빙 돌았다. 그냥 빙글빙글 돌다가 울면서 잠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 사이에 말다툼이 늘었고, 큰 싸움의 빈도가 높아졌다. 제일 충격적인 것은 세월호 사건이 뉴스에 실시간으로 나올 때, 학원 선생님들이 기회로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저 사건으로 인해 집중을 못할 때, 너희들은 세상에 관심을 두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고. 친구는 그 사건을 계기로 기숙학원을 빠져나왔다. 스스로의 감정을 그 안에서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고, 다들 미쳐가는 것 같았다고. 유일하게 좋았던 기억은 밤에 잠을 안 자고 별을 바라보는 시간뿐이었다고. 이것은 나의 친구가 겪었던 경험이지만 나는 이것이 한 사람이 겪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수생활을 겪었던 나의 친구들은 공통적으로 신체가 망가졌고, 트라우마가 되었고, 성격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은 대학에 무사히 들어간다고 쨘- 하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땐 그랬지’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몸은 기억한다. 그 억압과 경쟁의 공간을.

나는 집에서 재수를 하며 초상집 같은 분위기에서 온갖 눈치를 보며 지냈고, 스트레스로 인해 체중 증가와 탈모를 겪었는데 숱한 친구들이 그러했다. 특히나 외고생이었기에 부모님들 또한 기대가 높았고, 들인 돈도 많아 높은 학벌로 보상을 받아야 했다. 소위 실패자가 되어 유령처럼 지낸 1년은 그 뒤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다. 우연히 별로 친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연락이 와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이들이 겪은 것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경험을 했다. 가정폭력을 경험한 아이, 그리고 삼수를 마치고서야 부모의 기대가 꺾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었던 아이도 있었다. 삼수를 하게 돼, 부모가 문을 부수고 여러 물건들을 던진 흔적들을 자신이 직접 찍어놨다고 웃으며 말하는 친구의 말은 나의 가치관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아이들이 사실 원하는 진로와 학과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기 까지, 그리고 부모가 자식들의 학벌에 대한 욕심을 버리거나 포기할 때까지 짧으면 1년 길면 끝이 보이지 않는 N 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 끔찍하게 외로운 시간들을 버티고 버텼을까. 이미 모든 것을 겪고 난 그 아이들의 의연함이 나의 학벌주의와 그로 인한 자격지심으로 범벅된 머리를 세게 후려쳤다.
나는 그동안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나의 부족함만을 탓해 왔는데, 그깟 좋은 대학이 뭐라고 이렇게 단체로 고통받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다들 그 시간을 버티고 나중에 보상받으라 하는 것일까. 누구나 사실 정리를 하면 학대인 것이 명명백백하고 화목한 가정이라 할 수 없는 환경인데. 당연하게 가족도, 친구도, 나 자신도 대학이라는 것에 집착하고 원하는 성적이 나올 때까지 절벽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이 압박과 부담은 스스로 각성하고 벗어나려 애쓰지 않는 이상 평생을 따라다닌다. 이 기괴한 순환이 이상하고 쓸 데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키보드를 두들겨 본다. 이 글을 본 누군가가 제발. 제발 이 순환에 상처 받지 않기를. 자신을 잃지 않기를. 그리고 그 폭력에 의연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어른들의 학벌주의를 아이들에게까지 물려주지 않기를. 그것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기를 바라고 바란다. 또한 그것이 비단 ‘대학’에 국한되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몇 살이 되고, 몇 년이 지날지언정 어릴 때 노출된 환경과 가족들의 사고방식은 계속해서 지속된다. 한 나라의 정치와 교육제도를 한 순간에 뒤집을 순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의 아이가, 나의 친구가,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지금은 충분하지 않을까.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한 번쯤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고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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