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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Aug 03.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56  꼴리는 대로

(프라도 미술관)


  노동절 휴가에 이어 스페인에선 마드리드만 다음날까지 휴일이라고 한다. 마치 과천시민의 날이 따로 있는 것처럼(물론 과천시민의 날은 공휴일이 아니다.) 마드리드의 날이라고. 지난 이틀 연이어 톨레도와 세고비아를 다녀와서 오늘 오전은 숙소에서 쉬며 여행 일정도 좀 간추려 보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숨차게 여기저기 찍고 다니는 바쁜 여행은 당연히 아니었다. 일정을 정해두고 시간 맞춰 다니는 여행도 아니었다. 내 관심이나 흥밋거리가 아닐 때 여기저기 유명하다는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은 남이 좋다는 곳을 확인하러 가는 느낌이 든다. 기차나 버스, 호텔에 맞춰 가는 일정은 계속 시간을 체크하면서 나를 긴장시키고 채근한다. 산티아고 순례 후 내 여정의 두 번째 포인트는 내 감각, 감정, 감성에 ‘자유를 허하라’였다. 한마디로 꼴리는 대로!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남 신경 안 쓰고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고, 타인보다 내면의 자신을 먼저 충족시켜주겠다는 거였다. 적어도 한 번은 충분히! 그렇게 멋대로! 지랄 총량의 법칙을 검증하는 거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도 분명 정반합의 논리가 적용될 거라고 믿는다. 앞으로 어떤 합이 나올지 궁금하다. 지금은 반의 시간! 난 삐뚤어지는 거다. 어떤 자기 검열의 반동이 와도!


  장거리 순례도 하고 관광도 해본 사람들은 흔히 ‘관광 후 순례를 떠나라’ 한다. 둘 다 동시에 해보지 않은 상태에선 다분히 편의적으로 순서를 정한다. 역사적 명소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관광할 때 받는 감동과 감명은 순례의 그것과 다르다. 순례, 특히 장거리 걷기 여정은 자신의 깊은 내면이 자연, 여타 외부 요인들과 강렬하게 공명함으로써 충만과 치유, 깨달음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순례 후 관광은 싱겁고, 관광 후 순례는 강한 여운을 남긴다고 한다.


  오늘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는 프라도 미술관을 세 번째로 구경하러 갔다. 며칠 전 소피아 미술관과 티센 미술관을 먼저 다녀온 터였다. 마지막 날에 프라도 미술관은 무료입장 시간에 맞춰 갔다. 마드리드를 떠나면서 마지막에 둔 일정이었다. 스페인 왕가가 소장해 온 3000점 이상의 역대 그림들을 모아 전시했다는데 그걸 두 시간에 보겠다고 생각한 건 최대 실수였다. 엘 그레코는 물론 고야, 루벤스, 라파엘, 벨라스케스 등등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천재 화가들의 자식 같은 작품들이 숨 막힐 듯 다가왔다. 앞서 두 미술관에서 구경한 그림들은 다 잊을 만큼! 강렬하고 감동적인 작품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는데 다 찾아보고 눈도장 찍을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아쉬운 대로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모여 있는 곳으로 가면 여지없이 유명한 그림들이 있었다. 역시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도수가 잘 안 맞는 안경 때문에 그림 가까이 가야만 하는 데 여의치가 않았다. 아쉬운 대로 뒤에 서서 보는 수밖에. 서서히 그림 속 인물들이 말을 걸어온다. “흥, 네가 공주면 다냐?”, “저 화가 놈 잘 그리고 있는 거지?”, “어디 맛 좀 봐라! 요 녀석” 뭐 이런 시답잖은 상상을 하면서 얼굴들을 뜯어본다. 나 같은 예술 문외한이 전문적 분석을 할 재능은 없고 멋대로 나대로 맛볼 뿐.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세상에 내놓은 자식이 쓸 만한지 험담 수준이다. 아마추어인 내게조차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엘 그레코는 드라마틱한 천재 화가임에 분명하다. 궁정화가가 되기까지 드라마 같은 인생역정을 겪은 고야는 그림보다 그의 삶에 더 마음이 갔다. 37세에 요절한 라파엘은 이미 그 시대에 고운 물광 콤팩트를 인물화마다 그려 넣은 선구자 같다. 들뜨지 않은 붓 터치는 섬세함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루벤스는 특히 여성의 몸을 다양한 각도에서 역동성 있게 그린 또 한 명의 천재화가다. 스페인 왕가가 독점 소장하고 싶을 만큼 작품의 스케일이나 솜씨가 여전히 세계적이다.


화가들은 빛을 화폭 위에 마음껏 부리는 빛의 마술사임에 틀림없다!

결국, 시간에 쫓겨 못 본 그림들을 남겨 두고 나와야 했다.

마드리드도 안녕히~

*프라도 미술관은 촬영 불가라서 사진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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