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bbatical Year on the road
산티아고 순례 890킬로미터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 생장에서 대서양 서북 단 끝 피스테라까지 나바라, 레온, 갈리시아 지방을 횡단한 것이고 스페인의 심장 마드리드, 세고비아, 톨레도는 카스디아라만차 지방을, 말라가, 코르도바, 그라나다는 안달루시아 지방에 포함되는 도시들이다.
말라가를 빠져나와 그라나다에 가까워지면서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산이 웅장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묵직한 비장함이 느껴졌다.
알람브라 궁전의 야경을 보기 위해 다로(Darro) 계곡을 따라 알바이신 지구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은 북유럽의 프랑스, 스위스, 독일 등과 다른 묘한 아련함과 신비감, 잔잔한 열기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강둑 앞에서 연주하는 거리 음악가들의 기타 선율 때문이었을까. 집시의 피가 흐르는 아티스트들의 자유로운 영혼이 아마도 내 안의 노매드를 건드렸을 지도......
미로 같은 골목을 몇 차례 헤맨 후에야 알람브라 전망대(Mirador) 앞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담장에 다닥다닥 붙어 시시각각 달라지는 태양이 알람브라 궁전에 연출하는 자연과 인간 건축물의 컬래버레이션을 즐기고 있었다. 전망대로서 생 니콜라(San Nicolas) 교회 앞마당은 최적의 객석이었다. 정면에 알람브라 궁전이 길게 고즈넉하니 비장미를, 그 뒤로 멀리 하얀 눈이 쌓인 시에라네바다산이 병풍처럼 서있고, 왼쪽 하늘엔 거의 다 차가는 흰 달, 오른쪽으론 진홍 핏빛으로 지는 해까지. 지상의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에 숨이 멈추는 듯, 나도 모르게 돌아서서 울컥했다. 이건 뭐지? 완벽한 아름다움에 슬픔이 배어 있었나. 그라나다의 비극적 한과 슬픔이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라나다에 오기 전에 다른 곳들을 거치면서 본방 예고편을 이미 많이 본 듯해서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라나다엔 특별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미리 준비하고, 인터넷 예매를 하지 않은 탓에 알람브라 궁전에 들어가려면 내일 새벽 5시까지 매표소로 가서, 줄 서서 8시부터 판매하는 현장 입장권을 사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5시에 가도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고 한다.
오늘 알바이신 언덕에서 본 알람브라 궁전의 야경은 TV 드라마가 가장 아슬아슬하고 궁금한 컷에서 딱 끝난 느낌이다.
다음 날 새벽 4시에 맞춘 알람에 깨었다가 다시 잠깐 졸다가 5시 15분쯤 티켓 박스 앞에 도착했다. 여전히 달은 높고 밝았고 별들까지 선명해서 밤인지 새벽인지 알 수 없었다. 언덕으로 올라갈수록 멀리 도시 불빛도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헉! 이미 수십여 명이 수군수군거리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맨 앞엔 밤을 새웠는지 침낭 속에서 자는 이까지 있다. 여전히 어둠 속에 알람브라는 잠들어 있는데, 알현자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
낮에는 태양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뜨거운데 새벽엔 몇 시간 서 있자 손가락 끝이 굳어진 듯 감각이 없어진다. 몸을 흔들고 팔을 비비면서 냉기랑 싸우는 동안 하늘이 서서히 밝아 왔다. 결국, 알람브라의 메인 궁전 네 개 입장권은 못 사고 알카사바와 헤네랄리페 두 곳 입장권만 입수. 앞사람들이 표를 사는 동안 방송에서 매진이라고 한 것 같았다. 에구구...... 알람브라 궁전 알현은 다음 기회에나. 아쉬운 대로 알람브라를 지키는 요새인 알카사바라도. 높은 성벽을 올라 망루에 이르는 달팽이 계단을 올라서면 그라나다 시 전체와 알람브라 메인 궁전의 벽들과 지붕은 물론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어제 알람브라 알현을 꿈꾸게 한 생 니콜라 전망대가 알바이신 언덕 위로 멀리 보인다. 알카사바를 구경하면서도 알람브라 궁전을 들여다보기 위해 높은 망루까지 계속 올라갔다. 궁전의 속살을 보긴 어려웠지만 겉모습을 보면서 그 내부를 상상해 본다. 헤네랄리페는 정원사의 정원이다. 이때 정원사는 이슬람의 신, 알라를 뜻한다니 신의 손길로 꾸며진 정원쯤이다.
알람브라 궁전의 정원을 보지 않은 채 헤네랄리페 또한 본방 사수를 자극하는 얄미운 한 컷 정도일 것 같다. 아쉬운 대로 갖가지 만개한 꽃들과 이슬람 고유의 화려한 패턴이 눈부신, 왕의 여름 별장 구경으로 위안을 삼는다. 정원 한편에 참수당한 고사목이 여전히 천 년 넘게 한자리에서 그날 왕의 분노와 참혹한 보복을 증거하고 있다니. 절대 권력이라도 사랑은 절대 소유할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보여주는 듯하다.(왕의 후궁과 밀회를 나눈 귀족 남자와 그 집안 식솔을 모두 죽였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사자들을 처단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밀회 장소에 있었던 나무까지 처단하다니. 연좌제도 아니고 불고지죄?)
작은 분수와 연못들, 계단 난간조차 물길로 만든 걸 보니 바빌로니아의 행잉 가든(Hanging Garden) 기술이 여기까지 전수된 모양이다. 물을 한 단 한 단 끌어올려 관개 정원을 만들다니 놀라울 뿐이다. 예고편만 잔뜩 본 기분으로 알람브라를 떠나는 마음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극적인 아름다움에는 비극이 서려있는 법이니 이쯤의 아쉬움이야 추억을 위해 깊숙이 넣어 두기로!
마지막으로 그라나다 대성당은 이사벨과 페르난도 왕실 예배당과 세트로 붙어 건설된 르네상스 스타일이었다. 성당 내부의 기둥은 어른 대여섯 명이 팔로 이어야 할 만큼 거대한 둘레였다. 천장은 말할 것도 없이 높았고 문들도 모두 거대했다. 그라나다를 이슬람 세력에게 탈환한 후 기독교 세력과 왕권을 확장하고 과시하기 위해서였을 게다. 사이즈로 힘을 과시하고 약자를 얕보는 비겁함이다.
2016년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춥고 차가운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친 대한민국 국민들!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대국민의 승리! 투표로 보여준 약자들의 대약진! 이 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울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