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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Choi Dec 04. 2018

Sabbatical Year on the road

-길 위의 안식년

Day 78  피카소 발견

 

  새마을 운동하듯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나가서 해 지기 전 퇴근하듯이 숙소로 들어온다. 관광 모드의 패턴이 자리 잡아가고 있지만,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쫓기지 않고 내 내면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는지 살핀다. 나에게 집중하고 케어하기 위한 50년 만의 일탈인데.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통제와 자기 검열, 오랜 습관이 작동하나 보다. 부지런히 뭐라도 하고 있지 않을 때 무엇인가 불편하고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이 동시에 치고 올라온다. 자유로운 영혼 놀이도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출근 시간은 지나갔는지 전철이 복잡하진 않았다. 어제처럼 도심 한가운데, 카탈루냐 광장에 내려서 대성당 첨탑만 보고 골목 사이를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걸어갔다. 대성당뿐만 아니라 도심 곳곳에 이름만 다를 뿐 대규모 성당들이 심심찮게 있다. 금칠한 교회에 머리가 어찔해서 그만 구경하려다가도 뭔가 다를지도 몰라 들어가 보곤 한다. 스페인이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던 게 확실하다. 그래도 지방마다 교회 스타일과 디테일이 상당히 다르다. 여기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도 성모상의 얼굴부터 같은 칼리프(말굽) 모양의 아치 창문과 문까지 중북부, 서남부들의 그것들과 같지 않다. 따라서 디테일과 분위기도 다르다. 대성당은 고딕 스타일이면서도 카탈루냐 장식이 가미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성당에는 수호 성녀 에울랄리아 전설이 서려있다. 기독교 탄압에 항변한 에울랄리아가 바르셀로나 총독에게 무자비한 고문으로 죽고 맨몸으로 사형당한 뒤 나무에 걸리는 수모를 당할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전설이다. 흰 눈이 내려 벗은 몸을 덮어주고 사람들이 추모의 기도를 드릴 때 흰 비둘기가 그녀의 입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녀의 관을 제단 아래 지하에 모시고 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 잊지 않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지난 10년을 통해 생생하게 겪고 배우고 있다.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은 여전히 가슴 저미는 집단 트라우마다. 성당마다, 인간으로 와서 죽은 신과 그를 따른 성인들, 왕들과 위인들의 무덤이 있다. 죽음과 함께하는 삶, 따로 뗄 수 없는 아이러니한 진실이다. 《호모 사피엔스》로 유명한 저자 유발 하라리가 2017년에 《호모 데우스》를 출간했다. 상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기억의 DNA를 통해 죽음을 넘어서서 신의 경지를 넘보는 것인가?


  대성당 앞마당에선 골동품 시장이 열렸다. 클래식한 열쇠부터 장식품, 액세서리들이 대성당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성당 건너편 건물 1층 현관 위에 피카소가 그렸다는 춤추는 사람들 모습은 선 하나만으로 단순화했지만 ‘안 봐도 비디오’ 일 만큼 재미나게 표현했다. 오랜만에 점심 외식을 하면서 모히토 한 잔으로 바르셀로나 관광객 기분도 내봤다. 오홋! 민트 향과 달달함 때문에 알코올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피카소 미술관으로 가야겠다. 뙤약볕에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피카소 미술관이 있는 지역은 보른지구라고 요즘 뜨는 핫 스폿이라나. 고딕 지구처럼 개성 있는 개인 아트 숍들이 콕콕 박혀 있었다. 여긴 작업도 하면서 판매도 동시에 하는 실용적인 공방 느낌이 더 난다. 예술가들과 장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자 상업지구다. 피카소 미술관 앞 티켓 창구 줄이 뱀처럼 몇 번을 휘돌아 한 시간은 기다린 뒤 입장했다. 반면에 온라인 예약을 미리 한 사람들은 바로바로 들어갔다.


  그의 활동 초기부터 말년까지 3000여 점의 방대한 작품이 시기별로 잘 나뉘어 전시돼 있었다. 그림을 배우는 초기에 학교에서 실습한 작품들에선 색상과 연필선, 붓 터치에서부터 탄탄한 기본기와 개성이 두드러져 보였다. 현실 참여적인 그의 사상과 철학을 담아내기 위해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예술 형태, 입체적 추상화의 세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감상하는 내내 나는 그의 삶과 예술의 자취에 대한 재미난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는 것 같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가 마침내 도달한 그만의 예술 세계는 필연적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천재적 명성은 허명이 아니다.


  디테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영화 <향수>의 배경이 됐다는 산 펠리프 네리 광장과 보른지구 일대는 중세의 다크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듯 고즈넉했다. 콜럼버스가 대항해 후 신대륙을 발견하고 스페인 왕에게 보고한 문서를 보관한 고문서관이 왕의 광장 한편에 있다. 가장 먼저 깃발을 꽂았다고 증거를 남긴 것이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셈이다. 문서로 남기는 꼼꼼함!(뻔뻔함? 발견도 아니고 도착한 것뿐인데 남미 원주민에게 물었을 리도 없다) 그렇다 해도 인정을 받기 위해선 국제적으로 힘이 있지 않으면 불가할 터. 발견이라는 말 자체는 제국주의자들의 관점이다.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니 여전히 힘의 논리가 주도했던 야만의 시대다.


왕의 광장 뒤편에서 핸드팬 연주가 오늘 하루를 마감하듯 편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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