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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역뿌리 Jun 27. 2018

<여중생A>, 그때 그시절 나를 다독여주었던  

영화의 스포가 있습니다.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기숙사란 친구들과 친해질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 덕분에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사적인 공간은 없다. 끊임없이 학업을 강요하는 학교, 나를 달랠 수 없는 공간은 나를 옥죄어왔고, 돌파구로 찾은 것이 '일기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말하듯이 글을 쓰고 싶어 일기장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씨밀레(영원한 친구)'라고 말이다.


  매일 나는 일기를 쓰며 나는 나를 다독이는 시간을 가졌다. 친구들이나 가족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 그렇지만 어딘가 털어놓을 데가 필요한 이야기들을 나의 제3의 친구, 씨밀레에 꾹꾹 담았다. 여기 더 외로운 환경에서 꿈같은 소설을 쓰며 자신을 다독이는 중학생이 있다. 바로 주인공 '미래(김환희)'다.


  미래는 가정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가 전부이고(엄마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소심한 성격 탓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소녀다. 어떤 것도 특출난 것이 없기에  담임 선생님에게도 그저 '반의 학생'일 뿐이다. 체육시간에 생리혈이 묻었지만, 어떤 친구들도 선뜻 가릴 수 있는 옷을 빌려주지 않는 그런 친구. 그래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소심하게 가린 후 양호실로 후다닥 달려가는 친구, 영화는 미래의 버거운 학교 생활을 찬찬히 따라간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생리대가 없어 아빠 몰래 아빠방을 뒤지지만 '도둑년'으로 아빠에게 낙인찍혀 폭력을 당하는 게 일상이다. 자신의 생존을 어디에서도 지킬 수 없는 여중생A,


도서관을 관리하는 미래. 도서관에 모든 책을 읽으며 소설을 쓰는 게 학교의 유일한 낙이다. <여중생A>의 스틸컷


  그러므로(라고 인과관계를 붙이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미래는 소설과 컴퓨터 게임 속에 빠져든다. 결말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소설과, 길드 속 친구들과 함께 악당을 무찌르러 다니는 게임 속으로. 친구들도 있고, 능력도 있는, 현실과 다른 가상의 세상이야말로 미래에게 유일한 돌파구다.


학교에서 처음 사귄 친구, 얼굴, 공부, 인기 어디 빠지는 게 없는 친구 백합. 그녀가 처음에 미래에게 관심을 가진 건 진심이었을까. <여중생A>의 스틸컷


  영화는 미래가 여기에만 머물게 두지 않는다. '태양(유재상)'과 '백합(정다빈)'이라는 학교 친구들, 그리고 게임에서 만나 현실에서 함께 일상을 만들어가는 '희나(수호)'라는 친구를 두고, 미래가 세상 밖으로 걸음마를 떼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처음에는 태양과 백합에게 자신이 썼던 소설을 들려주며,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가며 교집합을 찾아간다.


  그러나 갓 걸음마를 뗀 아기는 실제 세상도 알지 못하고, 그렇기에 연습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관계에 서툰 미래는 다시 그들로부터 배신과 따돌림을 당하고, 여전히 변함없는 가정 환경 속에 그녀 자신을 '자살'로 내몬다.


인형탈을 쓴 희나. 둘은 '자살 동맹'이자 '버컷리시트 동맹'이다. <여중생A>의 스틸컷


  이때 만난 친구가 바로 '희나'다. 게임 속 닉네임이 희나일 뿐, 실제로는 미래에게 서너살 많은 '오빠'다. 그 둘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버킷 리스트를 지워나가는 여정을 함께 떠난다. 그러다 미래는, 친구들 간 갈등을 건강하게(원론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일상을 회복한다. 희나도 마찬가지. 서로가 없었으면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함께 연대함으로써 각자의 일상을 찾을 수 있었다(미래의 가정환경 이야기 결말은 나오지 않아 찝찝하지만).

 

  혹자는 갈등이 '극적으로' 봉합된다는 부분에서 비난한다. 우연에 기댄 서사, 작위적인 설정, 급마무리 때문에 몰입에 방해된다는 평이 부지기수였다. 하긴, 웹툰에서 주목받았던 많은 에피소드를 114분에 담기엔 한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좋았다. 그시절, 유난히 세상이 달라보이고 외로움을 많이 탔던 우리의 그때 그시절 '나'와 함께한 감정과 생각들을 한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섬세하게 짚어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안의 작은 자아에게 ‘괜찮아’ 혹은 '괜찮아질거야'라고 다독여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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