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역뿌리 Jul 07. 2020

#5 쇼핑왕

"쇼핑은 늘 짜릿해 항상 새로워"

지난 5개월 간 고정 수입이 생기면서 쇼핑을 즐겨하기 시작했다. 2년 전 내 인생 첫 월급을 받았을 때 거액의 돈(지금 생각하면 매우 작고 귀여운 월급)을 흥청망청 다 써버리곤 했지만 이번에는 무려 '합리적인' 쇼핑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합리적인 쇼핑. 이론과 근거에 따라 쇼핑하는 행위. 이론과 근거는 모르겠고 여태까지 취해왔던 충동 구매 방식에서 벗어나, 나름의 체계 속에서 쇼핑이 이뤄졌다. 내 옷장을 다뒤져도 없는 옷인지, 있는 옷이라도 소재나 칼라의 차이가 유의미한지(개나리 노랑과 레몬 노랑은 엄연히 다르다), 얼마나 자주 입을 수 있는지, 자주 입지 않더라도 이 옷을 입었을 때 어떤 감정을 주는지 등 구매를 하기 전에 하나둘씩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히 이 옷을 착용했을 때 취하게 되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구입하는 것과는 상이한 풍광이었다. 


합리적인 쇼핑은 후회가 적다. 신기하게도 이전보다 적은 가짓수였지만, 효능감은 꽤 컸다. 한 번에 최소 3개 이상은 구입해야 직성이 풀렸는데 이젠 하나만 구입해도 오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충동 구매가 쇼핑하는 '행위'로 내게 찰나의 환상을 안겨주었다면, 합리적인 쇼핑은 보다 옷 자체(itself)에 집중하게 되었다. 정말로, 내가 구입한 옷에 대해 무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 


"네가 한낱 대량 생산품 중 하나일지언정 어디에도 없는 유일무일한 것이기에 난 널 사랑하기로 결심했어"

하나를 구입하기 위해 거치는 치열한 사고 행위와 선택 버튼을 누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은 이제부터 '그' 옷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아니나다를까, 새 옷을 마주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이 옷을 입으면 특정 이미지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설렘과 달리, '어떤 옷이랑 매칭하면 이 옷과 어울릴까?' 라는 보다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 현실적인 질문은 매일 아침 다양한 옷을 매창하는 즐거움을 주었고, 매번 달라지는 룩들은 매일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똑같은 옷을 반복해서 입어도 더이상 권태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쇼핑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똑같은 패턴으로 돌아가는 일상에서 난 언제까지 달려야하나, 푸념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럴 떄마다 이미 만들어진 기성복처럼 내게 주어진 동일한 매 순간들을 낯설게 보기, 그리고 합리적으로 옷을 구매하는 과정처럼  매순간을 치열한 합리 속에서 살아보기. 누군가에게는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숨막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즉흥적으로 살아왔던 나에겐 인생을 가장 뜨겁게 살아가는 방식인 것 같다. 내일은 노랑색의 찰랑거리는 바지에 검정 가디건을 입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2. 착한 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