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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역뿌리 Oct 29. 2019

#2. 착한 인간


내 인생은 착하다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에서 시작한다. 


고등학교 시절, 반에서 착한 친구로 통했던 내게 친구들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왔다. 특히, 타지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던 탓에 그 빈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한창 예민하던 그 시절, 공부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음에도 친구들의 고민상담을 거절할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마다 힘들어하는 그들의 감정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 공교육에서 참된 교육을 실현할 수 있을까 논하던 친구도, 모두가 잠든 새벽에 친한 친구와 다퉜던 이야기를 늘어놓는 친구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미안한데 나 지금 해야 할 일이..’라는 말은 속으로 꿀꺽 삼키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내게 친구들은 넌 순수하고 착한 게 큰 장점이야. 라고 말했다. 그래? 라고 어물쩍 웃어넘겼지만 그 말이 싫었다. 첫째, 나는 착하지 않고, 둘째, 착하지 않는 내가 착해보인다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 착한 성격이 전부일지도 몰랐다. 나에게는 다른 특성이 없는 것일까. 착하다는 언어로 나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을까. 그때부터 무색무취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 이외의 다른 분야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힙스터를 꿈꾸며.

     

언더그라운드 힙합은 힙스터를 꿈꾸는 18세 고등학생에게 제격이었다. 아이돌의 기계적인 랩은 물론, 에픽하이나 아웃사이더와 같은 유명한 힙합 가수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남다른 무엇. 가난하지만 고정관념에 박제된 사회에 반항하는 가사를 쓰는 래퍼들은 이 험난한 세상 속 진정한 멋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 같았다. 멋졌다. 이들처럼 랩을 하지는 못하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나도 멋진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틈만 날 때면 아이팟을 들고 다니며 친구들에게 노래를 추천해줬다. 나의 큐레이션으로 추천해준 곡에 친구들이 공감하면, 내가 마치 그 노래의 주인이 된 것처럼 기뻤다. 서울로 대학에 간다면 언젠가 홍대 클럽에 자주 출몰한다던 더콰이엇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날리겠다고 다짐했다.

     

친구들이 나를 찾는 횟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여전히 내가 착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타인이 아닌, 내가 착하다는 말을 핑계 삼아 내 자신을 무색무취한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사람의 가치는 타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닌, 내가 만드는 것이다. 착하다는 말을 사랑하기로 했다. 착함의 극에 달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선한 축에는 속하는 것이니 이것은 나의 눈에 띄는 장점이라고 생각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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