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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옹수 Dec 24. 2019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데카르트]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이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1650)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두 명의 데카르트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두 명의 데카르트는 이론적 차원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어쨌든 데카르트는 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한 명은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éthode≫(1637년)에 등장하는 '실존적인 데카르트'이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1641년)에 등장하는 '추상화된 데카르트'이다. 중요한 것은 전자가 없었다면, 후자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방법서설≫에 등장하는 '실존적인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라는 낯선 곳, 당시 가장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에 머물렀다. 이곳에 거주하면서 그는 프랑스에 있는 동안 자신이 참이라고 생각했던 대부분의 것들이 사실은 프랑스 내에서만 통용되던 협소한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참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프랑스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특수한 것일 뿐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절감하데 된 것이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라는 선례라는 점, 더욱이 그럼에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진리에 대해서는 그 발견자가 국민 전체라기보다 단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진실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 진리성이 유효하게 증명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방법서설≫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결국 여행이 중요했던 것이다. 익숙한 공동체를 벗어나 다른 공동체에서 살아봐야, 우리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 데카르트가 프랑스라는 한정된 곳에만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낯선 곳에서 회의하게 되는 '실존적인 데카르트'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성찰≫애 등장하는 사유주체로서 데카르트는 바로 이 '실존적인 데카르트'에서 논리적으로 재구성된 '추상화된 데카르트'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근대철학은 여행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의 선배격이라고 할 수 있는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가 남긴 방대한 저작 ≪수상록 Essais≫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아마도 그는 자기 자신을 짊어지고 갔다 온 모양일세.'"


중세시대가 마무리되면서, 유럽 지성인들 사이에는 여행이 빈번해진다. 천국만 바라보다가 이제는 심드렁해진 것이다. 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공동체를 넘어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려는 움직임이 발생한 것이다. 여행을 가는 순간, 그들은 차이, 즉 자신이 살던 공동체와 타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 사이의 차이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에 머물면서 그들은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게 된다. 반성이니 성찰이니 묘사니 하는 것도 모두 여행이 발생시킨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실존적 데카르트'가 여행 중인 데카르트였다면, '추상화된 데카르트'는 여행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온 데카르트라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추상적 데카르트는 자신이 발견한 코기토가 실존적 데카르트의 여행 경험에서 유래했다는 걸 쉽게 망각한다. 만약 암스테르담이 아니라 당시 그가 조선이란 나라에게 왔다면, 아마도 데카르트가 회의했던 내용이나 그것을 통해 새롭게 구성된 코기토 역시 상당히 다른 면모를 띠었을 것이다. 하긴 당연한 일 아닌가? 보라색이 검은색을 만나면 자신이 밝은 색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보라색이 밝은 핑크색을 만나면 자신이 무거운 색이라고 자각할 테니 말이다. 어쨌든 데카르트는 암스테르담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특정한 성격의 코기토를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시키려고 시도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코기토의 확대 적용이 단지 ≪성찰≫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방법서설≫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에 관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도록 하자.


양식 bon sens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에는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 사람도 그것만큼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는 잘 판단하고,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별하는 능력, 즉 일반적으로 양식 혹은 이성으로 불리는 능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천부적으로 동등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이다.
≪방법서설≫


데카르트에게 양식은 그의 말대로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별하는 능력", 즉 이성을 의미했다. 데카르트는 모든 인간이 양식, 즉 이성을 천부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 대다수 인간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묻는 질문에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자신이 속한 시공간적인 공동체의 차이에 따라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을 표명할 것이다. 사실 이 때문에 여러 공동체의 성원들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 아닌가? 여성이 남성적 질서에 항상 복종하는 것이 참된 행동이라고 간주한 시절이 있었다면, 그와 달리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이 거짓된 행위라고 비판하는 시절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데카르트는 무엇을 참이라고 생각하는지의 여부는 문제 삼지 말자고 제안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참이라고 주장하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한다는 것에만 주목하자는 것이다.


≪방법서설≫에서 그 단초를 살짝 보인 데카르트는 이제 ≪성찰≫에 이르러 방법론적 호의를 통해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양식, 혹은 이성을 '코기토'라는 개념으로 정당화하려고 시도했다. 수학적 진리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사유주체로서 코기토는 가장 순수한 양식, 혹은 가장 순수한 이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ego sum, ego existo.'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내가 사유하는 동안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유하기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필연적으로 참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확히 말해 단지 하나의 사유하는 것, 즉 정신, 영혼, 지성, 혹은 이성인데, 나는 이 용어의 의미를 전에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참된 것이며, 참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일까? 나는 말한다. 바로 사유하는 것이라고.
≪성찰≫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는 어떤 회의주의자도 부정할 수 없는 제1명제를 밝혔던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이다. 아무리 모든 것을 회의하는 사람이라도 회의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생각하고 있다는 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회의주의자는 자신의 육체마저 회의할 수도 있다. 꿈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몸을 가진 존재로 살기까지 하니 말이다.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기존에 제1명제로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내가 사유하는 동안만 나는 존재하고, 사유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을 멈춘다"라고 말이다. 결국 데카르트가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육체를 포함하는 나의 실존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것은 '순수한 생각', 혹은 그의 말을 빌리지만 "정신, 영혼, 지성, 혹은 이성"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그가 말한 존재란 육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셈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심신이원론은 이렇게 코기토 논증에서 도출된 것이다.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은 무엇인가를 의심할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의심할 때만큼 인간의 생각이 가장 왕성하게 작동하는 경우도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 의심만큼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잘 보증해주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참이라고 통용되는 진리에 다시 근거를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심하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참이라고 믿고 있던 것이 진정으로 참일 수 있는지 근거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이성 reason이란 말이 가진 함의는 매우 시사적이다. 'reason'이란 단어는 사전적으로 인간이 가진 추리 능력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유'나 '근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성은 '이유를 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이유나 근거가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명확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있다. 결국 확실한 것은 생각이나 이성밖에 없지만, 그것이 내용이 있는 이유나 근거를 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니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내용이 없는 순수한 형식만을 존재하는 불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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