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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 May 06. 2024

산며드는 일곱 번째 이야기

황매산

유채꽃이 필 때는 제주도로 휴가를 다녀온 동료의 사진들을 보며 대리 만족했고, 벚꽃이 만개했을 때는 2주 넘게 빡빡한 업무 스케줄에 시달렸다. 꽃구경은 뒷전이고 지친 몸을 달래고, 내일을 잘 버티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아쉬운 대로 진달래꽃을 보러 비슬산에 다녀올까도 했지만, 야속하게도 직전에 모든 일정이 틀어졌다. 이제 남은 건 철쭉과 장미, 수국 정도라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 지체하다간 봄이 다 지나갈까 봐, 부랴부랴 국내에서 자연 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황매산으로 향했다.


수요일 이른 새벽은 날씨가 제법 선선했다. 귀찮다고 비만 안 오면 그만이긴 하던 나였지만, 휴게소에 내리자마자 따뜻한 커피부터 찾았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오들오들 떨리던 몸이 진정되고, 세포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흐린 날씨에 정말 비만 오지 않았다. 어제까지 분명 반팔 차림으로 다녔는데, 하루가 지났다고 이 정도로 추워질 줄이야.


등산로 입구의 안내판이 오른쪽으로 가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비가 그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은 축축하고 질퍽거렸지만, 풀 냄새를 잔뜩 머금은 공기만큼은 신선하고 상쾌했다. 힘차게 나선 오르막은 발밑이 약간 꺼지고 미끈거릴 뿐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돌무더기를 밟고 오르는 재미가 있는 너덜 길이 취향이지만, 강력한 유산소 운동 효과를 선사해 주는 이런 길도 나쁘지 않았다. 야무진 경사에 종아리가 저려오기 시작하자 소처럼 우직하게 한 발씩 천천히 옮기면 어느새 정상에 도착한다던 아는 작가님의 조언이 생각났다. 나는 소다, 소다. 급할 것도 없이 천천히 갔다.


등산로에 오른 지 40여 분 만에 민봉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시야가 확 트였다. 아래에 합천호, 저 멀리에는 구름 속에 살짝 가려워진 지리산 천왕봉이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간식 먹거나 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사람들이 봉우리를 가득 메웠다.


“사진을 찍어줄게요”

“아, 찍어드릴까요?”

“아니, 아니 그쪽을 찍어주겠다고요”


굳이 여기서 사진을 찍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괜찮다고 사양하려는데, 아주 운 좋게 타이밍을 놓쳤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던 제안 당사자는 이미 위치도 잡아주고, 카메라 세팅도 모두 마쳤다. 음… 그래. 찍자. 남는 건 사진뿐이니.


구도와 배경, 그리고 포즈가 완벽한 3박자를 이뤘다. 이러기도 쉽지 않은데, 예쁘게 잘 찍어주셔서 감사했다.


“어떻게 혼자 왔어요?”

“산 타는 걸 좋아해서, 종종 혼자서도 오곤 합니다”

“등산만큼 건강에 좋은 운동도 없는데. 나도 산에 다닌 지 20년 가까이 됐는데, 덕분에 이 나이에 잔병치레 하나 없이 건강해요”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는 실례가 될까, 묻지 않았지만, 최소 10~15년은 동안일 것만 같았다. 일행이 없고, 가는 방향이 같아 서로 사진 찍어주며 안면을 튼 김에 여자들끼리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평상시에 붙임성이나 친화력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들을 두루두루 사귀기보다,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쪽이다. 그러나 산에서만큼은 예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많이 생긴다.


사람들로 북적이다 못해, 미어터지는 정상을 지나 철쭉 군락지로 향하는 길목에 돗자리 펴고 자리 잡으니, 각자 취향껏 준비한 먹거리가 등장했다. 들기름에 볶은 멸치를 밥과 김에 말아서 완성된 주먹밥과 닭가슴살과 풀때기로 가득 채워진 다이어트 도시락이 상반된 매력을 이뤘다.


“스트레스받지 마. 스트레스받는다고 우리가 무슨 이득이 있어? 스트레스받는 게 일 때문이야, 상사 때문이야?”


“둘 다요. 회사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고, 그것 때문에 상사의 심기가 예민해져 자꾸 눈치를 살피게 되죠”

“눈치 볼 거 없어.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하면  돼. 회사 분위기가 어떻든 간에, 출근하면 모두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힘차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집중에서 일하고, 시간 되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퇴근하겠다고 인사하고 가면 돼. 그래야, 상사도 ‘아, 저 사람은 일한 때 제대로 일하고, 시간 되면 딱 가는 사람이구나!’라고 인식하고 더 이상 눈치 주지 않지. 눈치 보며 굳이 스트레스받아 가면서 더 더 남아서 일을 할 필요가 전혀 없어. 대신 근무 시간에는 월급을 받는 만큼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 거야. 그러면 네가 떳떳하니, 누구도 만만하게 보지 않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 누가 뭐라 하면, ‘네~’라고 하고 본인이 할 일에 집중하면 돼. 스트레스받아가며, 참을 필요는 전혀 없어. 네가 걱정한다고 해서 풀릴 문제가 아니면 굳이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이 뭐가 있어”


그 어렵다는 FDA의 승인을 받은 제품을 개발한 중견 회사의 임원이자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조언이었다. 동시에 그동안 좀처럼 풀리지 않던 고민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이었다.


눈치 보며 스트레스를 받을 시간에, 내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 제대로 잘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근로 관계고, 그러기 위해 다니는 회사다.

고민했던 문제가 풀리면서 마음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웠던 하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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