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드물다. 오히려 영어 외에 제2외국어도 쏼라쏼라 하는 직원들이 많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이 숫자를 가지고 일을 한다. 게다가 십여년 전까지 신입사원 채용 최고의 덕목은
'체 덕 지'였다. 똑똑하고 영어를 잘하는 것은 기본이요, 그 중에서도 운동을 잘하면서 똑똑함을 요구했다.
그러다 보니 남직원들의 성향은 비슷(?)했다. NBA(농구)나 메이저리그(야구), EPL(축구) 같은 스포츠를 ESPN에서 보는 걸 좋아하고, 본인들도 운동을 좋아하는 숫자 덕후들... 아쿠아맨이 되기 이전의 나는 born to be a Basketball Player 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NBA를 보는 덕후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NBA와 숫자가 더해진 교묘한 조합의 끝에는 'NBA 환타지 리그'가 있었다.
지금도 가족들은 내가 도통 무슨 놀이를 하는지 관심도 없기 때문에 참말로 덕후들의 놀이는 맞는 거 같다.
환타지 리그는 실제 NBA 선수를 12명의 구단주가 각각 자신의 팀으로 드래프트해놓고, 그 선수들의 시즌 경기결과 (출전시간,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등등)을 팀별로 합쳐서, 매주 팀별로 승패를 겨루는 게임이다. 매주 경기결과를 합쳐서 NBA 정규시즌이 끝날 즈음에 가장 좋은 팀 성적을 가진 팀이 우승한다.
매년 12명의 덕후들은 10월 중순쯤 사이버 공간에서 만난다. 사무실이 뉴욕, 런던, 두바이, 스위스 등지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는 것부터가 우선 큰 이벤트다. 사실상 NBA 선수들의 실력은 이미 시험성적표처럼 펼쳐져 있고, 최근 실적 등에 기초해서 올해 실적을 추정하여 Yahoo에서 선수들을 1번부터 500번까지 sorting을 해놓는다. 드래프트 시작 10분전, 12명의 덕후들은 본인의 픽 순위를 알게 돼고... 본격적인 머리 굴림이 시작된다.
1번픽을 뽑은 사람은 1번, 24번, 25번, 48번....
2번픽을 뽑은 사람은 2번, 23번, 26번, 47번...
3번픽을 뽑은 사람은 3번, 22번, 27번, 46번...
그리고 12번 픽을 뽑은 사람은 12번, 13번, 36번, 37번...
이런 순으로 선수들을 뽑게 된다. 각 팀별로 포지션별 TO에 맞춰 총 12명의 선수를 드래프트하고 스쿼드를 꾸린다. 12명의 아재이자 덕후들의 놀이를 위한 올해의 드래프트는 한글날 밤에 열렸다. 시차 등의 이유로 한국 시간 밤 10시반에 시작되었고 12시쯤 끝났다.
예전만큼 NBA를 자주 보지도 않아서 매년 스쿼드를 꾸리는 게 쉽지만은 않다. 잽싸게 ESPN이나 Yahoo에서 제공해주는 선수들 (특히 신인들) 리포트를 영어로 잽싸게 읽어봐야 하고, 트레이드나 선수 부상여부, 회복상태 등에 대해서도 이거 저거 따져보며 내가 꾸릴 팀에 적합한 선수들을 추려본다.
매년 그렇지만 드래프트를 하고 나면 각 구단의 오너(구단주)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부상의 위험이 있지만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선수들을 좋아하는 구단주도 있고, 나이는 있지만 여전히 각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는 선수들을 선호하는 구단주도 있다. 이런 정성적인 것을 무시하고 오로지 숫자로 보이는 스탯만 가지고 판단하는 로봇같은 구단주도 있다. 나의 경우는 출전시간이 충분한 (즉, 부상에 시달리지 않을 것 같은 건강한) 선수를 맨 앞으로 놓고, 팀에서 주전 여부, 그리고 실제 하이라이트나 게임에서 보여지는 work Ethic(굉장히 주관적이지만 경기에 집중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뭐 그런 나만이 보는 기준)등을 보고 팀을 꾸린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비범한 조직 신한은행'처럼 (괴물같은 NBA 속에서) 특출날 것없는 선수들로 꾸려진 그런 팀이 된다. 단적인 예를 들면 NBA의 가장 핫 핸드인 스테판 커리가 앞에 있었지만, 그의 스타성보다 그의 들쭉날쭉한 출장시간이 맘에 안 들어 다른 선수를 뽑는 그런 것 말이다.
다음주에 NBA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의도하지 않게 많은 NBA 기사들을 영문으로 접하고 또 뉴스들도 듣고 보면서 자연스레 지하철에서 덕후놀음을 시작할 수 있다. 머 이게 영어공부가 될까 싶지만, 다수의 질병 또는 부상을 영어로 익히게 돼고 머 그럭저럭 지하철 출퇴근 시간에 꽤 즐거움을 준다. 가끔 덕후들과 모여 피자에 맥주를 마시며 주변 사람들은 1도 관심없을 법한 NBA 선수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덤이다.
내 옆에 앉은 유타재즈의 광팬인 한 구단주에게 '가끔 시즌 중간에라도 이 선수를 빼고, 저 선수를 add 하는 거 어떠냐?' 물으면 그는 "음....저 선수는 자유투 성공율이 낮은 편이고, 전체적으로 득점-리바운드가 10-7 이상 넘기 어렵기 때문에 저는 별로인 거 같아요." 라고 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농담처럼 진짜 NBA 구단주가 되어 저 선수들을 데리고 있다면 어떨까 라고 얘기하는데... 그들의 연봉이 아무리 싸도 우리 12명을 합쳐놓은 것보다 많을테니 언감생심이긴 하다.
추워지기 시작하면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귤까먹으며 읽던 만화책처럼 환파지 리그가 시작된다. 국내에서는 어느새 농구가 인기 바닥인 스포츠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미국에서는 인기가 좋은 편이니~ 미쿡으로 출장이나 여행을 가게 되면 다시금 NBA를 직관하길 바래본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