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웅주 Sep 02. 2018

존 카니 음악 영화가 갖고 있는 비현실적 허구 비판

영화는 꾸며진 허구의 이야기이나 이야기의 기반은 우리의 삶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일종의 드라마(서사)의 형태로 구현되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공상과학의 영역이나 초자연적 사건을 다룬 특정의 장르 영화라도 등장하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을 갖게 된다. (심지어 영화 그래비티와 같은 차단되고 고립된 공간일지라도). 하물며 일상을 잔잔하게 관조하거나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라면 더더욱 그 영화 속 모든 환경은 현실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게 구성된다.


따라서 영화는 알게 모르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러 시대적 배경을 무대로 삼을 수 밖에 없게 되고 중요한 사건의 불씨에서부터 사소한 하나의 미장센이나 소품까지도 그 시대의 환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아일랜드 태생의 존 카니는 음악을 소재로 원스, 비긴어게인, 싱스트리트 작품을 연달아 흥행의 반열에 올리며 헐리우드에서 위플래쉬, 라라랜드를 연출한 데미안 차젤레 감독과 함께 뮤지컬 영화 장르를 양분하고 있는 각본가 겸 감독이다. 


John Carney


그의 영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첫 번째는 음악을 주요 소재로 활용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당시 시대의 암울한 상황을 음악으로 이겨내며 주인공의 성장과 자아의 발견을 주요 주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쇠퇴하고 공허해진 더블린을 배경으로 아버지를 도와 허름한 전파사를 하며 음악을 하다 동유럽 태생의 이민자 여성을 만나 음악으로 서로 아픔을 치유하고 성장하는 원스,



 1980년대 경제 불황과 과도한 민영화로 국가의 공공서비스와 교육과 복지 시스템이 붕괴된 작은 어촌 마을에서 친구들끼리 밴드를 구성해 성장에 이르는 싱스트리트, 



그리고 한 때 잘나가던 음악 프로듀서와 스타가 되어 변심한 남자친구를 따라 뉴욕에 온 평범한 여성이 뉴욕의 게토에서 도시의 사운드를 담아내며 재기하게 되는 비긴어게인 모두 이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존 카니의 영화는 유독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한국인들이 전 세계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하고 흥이 많아서’라고 단순히 생각할 만한 문제는 아니다. 


나는 존 카니가 생각하는 음악이 해줄 수 있는 사랑과 치유의 선기능에 대해서는 십분 공감할 수 있지만, 존 카니가 음악을 통해 성장하고 자아를 찾는 과정 속에서 소비되는 여러가지 현실적 문제들은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소비하거나 혹은 애써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주인공이 음악을 위해 노력하고 구성하고 주변의 장애물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상당히 아름답고 순탄하게 그려지는 점도 비현실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존 카니가 담아내는 그 시대의 상황은 꽤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배경보다 작위적이고 거짓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경쟁과 빈부격차, 그리고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한국인에게 이런 달콤한 판타지로 가득한 주인공의 성장과 해피 엔딩은 그래서 꽤 중독성 높은 카타르시스를 전달한다. 


마치 뜨거운 여름 한 낮 마시는 한 잔의 시원한 콜라와 같은.



물론 영화는 다큐가 아니며 2시간여의 시간에 기승전결을 담아낼 수 있는 함축미를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다른 부차적 요소들은 고의로 누락하거나 생략하는 것도 나름대로 영화적 장치의 하나다. 영국과 미국은 일찌감치 세계적 음악의 조류를 좌우하는 양대 산맥이며 음악을 접하거나 대하는 자세가 한국과 크게 다르다는 것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문화적 격차와 차이점을 한국의 상황과 동일시하여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매우 편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존 카니 방식의 반복되는 드라마의 플롯, 즉 주인공의 비루한 현실 – 누군가 잠재되어 있던 음악적 재능을 일깨울 조력자(혹은 버디)와의 만남 – 음악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치유하는 과정 – 주인공의 자아 성찰과 성공으로 이어지는 존 카니식의 이런 서사 구조가 꽤 그럴 듯한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그려지면서 많은 대중들에게 ‘거짓이 주는 위안과 희망’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런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며, 그 음악적 재능을 꽃 피울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들과 함께 음악에 대해 깊이 교류하고 하나될 수 있는 기회도 쉽지 않다 (각자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사는 노동자들이 매일 만나 음악에 대해 어떻게 논의하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기회를 잡아가는 과정이나 성공의 사다리로 올라가는 과정은 철저히 솜사탕 같이 달콤하나 그 시각은 상당히 자본과 권력자의 시선으로 바라봐 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성공하였고 가난과 불행에서 벗어나 흔히 말하는 주류사회로 편입하게 되었으며 다시는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존 카니식 음악을 통한 자아성찰과 성장은 결국 돈과 명예, 혹은 사랑의 결실로 이어지는 꽃길에 다름 아니다. 이건 결코 음악을 통해 이뤄내고 싶어하던 것이 아니다. 


뭐든지 대충하면 안된다는 마음만으로도 안되는 것은 너무나 많다는 걸 우린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세계 최고의 드러머를 꿈꾸면서 순수한 풋사랑과 가족과의 일상을 떠나 혹독하고도 비인간적인 스승의 조련을 통해 자리와 명예를 쟁취하고도 결국 인격적으로 파탄에 이르는 위플래쉬나 사랑하는 사람과 주어진 성공 대신 결국 자신이 꿈꾸던 작은 공간 하나를 선택하고 마는 라라랜드는 그래서 훨씬 더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그것이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이야기이고 오히려 그들에게 더 큰 위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결코 그렇게 녹록하지 않으며, 음악이 주는 달콤한 안에는 그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피와 땀이 서려 있다. 이것은 결코 판타지가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2004. Feb. Gimpo - Haneda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