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Hobbes-Leviathan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복잡하고도 오랜 논쟁들 속에서도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정치는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이라는 명제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한 다양하고도 복잡한 정의들은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또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에 대한 대답들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정치를 하는 주체인 인간 존재가 무엇인지 또는 무엇으로 인식되는지를 먼저 해명하지 않고는 정치를 올바르게 정의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는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평등한 존재라고 선언한 시대이다. 근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받는 모든 단어들은 인간의 평등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그런 수식을 받을 자격이 없다. 따라서 근대의 세례를 받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평등이 가지는 의미를 축소시키고자 노력했을지언정 인간의 평등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했다.
홉스 역시 근대적 철학자로서 『리바이어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자연은 인류를 육체적·정신적 능력에서 평등하게 창조했다. … 이런 평등성을 부정하는 것은…자만일 뿐이다.” 홉스는 이런 능력의 평등에서 “목적 달성에 대한 희망의 평등”이 생긴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비슷한 희망과 욕구를 가지고 이를 달성하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희망과 욕구의 대상은 무엇이든지 한정된 것이고 따라서 이를 차지하기 위해 인간은 서로를 적으로 돌리고 불신하며, 곧 전쟁을 일으킨다. 바로 이것이 자연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이다. 홉스는 이런 자연상태는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라 보았는데, 이런 상태에서 “가장 나쁜 것은 두려움과 폭력에 의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외롭고, 가난하고, 비참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악에서 벗어나려는 정념을 품게 되고, 이성을 통해 그 악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율을 발견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법이다.
이성을 통해서 찾아진 제1의 자연법은 “모든 사람은 평화를 획득할 가망이 있는 한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화 달성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어떤 수단이라도 바라거나 사용해도 좋다”이다. 전문은 모든 인간은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고, 후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얻어지지 않을 때는 생존을 위한 어떤 방식의 노력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제1의 자연법으로부터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2의 자연법이 도출되는데, 그것은 “인간은 평화와 자기 방어를 위해 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한, 또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럴 경우에는 만물에 대한 이 권리(홉스는 자연상태에서는 모든 인간은 생존을 위해 만물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심지어 상대의 몸에 대해서까지도 그 권리를 갖는다고 말한다)를 기꺼이 포기하고, 자신이 타인에게 허락한 만큼의 자유를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서로 간에 신약(信約)을 맺게 되는데, 제3의 자연법은 바로 “신약을 맺었으면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연법들과 그에 기반한 신약들은 인간이 전쟁상태에서 평화상태로 진행하기 위해 필수적인데, 여기서 평등에 대한 홉스의 신념은 다시 한 번 제9의 자연법으로 표출된다. “자연이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었다면, 그 평등은 인정되어야 한다. 설령 자연이 인간을 불평등하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평등한 조건에서가 아니면 평화상태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을 평화상태로 들여보내기 위해서라도) 그런 평등은 용인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토록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홉스는 왜 불평등을 용인하고 심지어 불평등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게 되었는가? 홉스는 불평등에 대한 용인과 복종이 인간의 “자기보존과 그것을 통해 좀 더 만족스런 삶을 통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 논의된 자연법들은 비록 인간의 이성을 통해 발견되지만, 그러한 자연법들이 자연스럽게 지켜지리라고 기대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연법의 준수가 인간의 자연적 정념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지키게끔 강제할 수 있는 공통의 권력의 위협 없이는 지켜지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들이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끔 자연법을 강제할 수 있는 “공통의 권력을 확고하게 세우는 유일한 길은 그들 모두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하는 것, 즉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합의체’에 부여하는 것이다. … 이것은 동의나 화합 이상의 것이며,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신약을 맺음으로써 인간이 단 하나의 동일 인격으로 결합되는 참된 통일이다.” 이로써 리바이어던이라 불리는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인격을 맡는 사람 또는 합의체를 주권자라 한다.
이렇게 성립된 국가의 주권자는 제한받지 않는 주권을 행사하는데, 그에 반해 국민은 통치의 형태를 변경할 수도, 주권자로부터 주권을 박탈할 수도, 주권자의 행위를 비난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다. 이제 거대한 하나의 인간으로 합쳐진 국가에서 두뇌를 맡은 주권자의 명령에 따라 손과 발을 비롯한 각 기관을 맡은 국민들은 그에 복종하는 길밖에는 남지 않은 것이다. 홉스는 이러한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성 밖을 보라고 말한다. 자연상태에서 겪는 끔찍한 비참함과 재난이 가져오는 불편함에 비하면 어떤 불평등이든 주권자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의 불편함은 작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이제 인간의 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혁명적 근대인 홉스는 사라지고, 불평등을 옹호하고 지배질서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반동적이고 수구적인 홉스가 전면에 등장한다. 이러한 홉스의 논리 전개는 바로 정확히 현대의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 담론의 논리 전개와 동일하다. 이 둘은 근대 이전처럼 평등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반동을 표방하지 않는다. 인간의 평등이라는 명제는 이미 최소한 법전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처럼 새겨져 있다. 그리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고대와 중세의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논리들은 근대와 현대의 달라진 사회 속에 들어맞을 수 없는 낡은 이론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불평등을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시작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성 밖을 보라! 홉스와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가 불평등을 옹호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바로 공포감이다. 지금의 체제를 바꾸려는 그 어떤 시도도 국가와 사회를 붕괴시키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연상태에서 살아가도록 만들 것이라며, 홉스와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정념 중 하나인 공포감을 자극한다. 그런 공포감은 불평등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저항하기보다는, “저 바깥보다는 낫지”라며 자기암시를 하고 지배질서에 대해 복종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홉스는, 그리고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대안을 꿈꾸고 상상하는 것을 불가능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 그들은 “대안은 없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법에 기입된 평등의 논리에 맞서 그 효과를 축소시키려는 불평등의 논리의 대응이다.
불평등을 옹호하는 자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자. 우리가 대안을 꿈꾸고 상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근대가 천명한 그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홉스와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의 정념에 심으려는 공포감, 즉 함부로 평등을 외쳐대다간 모두가 비참한 자연상태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공포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접속사를 바꿔야 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