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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Sep 01. 2019

정체성에 관하여

강남-좌파 또는 남성-페미니스트의 불가능성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기인식, 다시 말해 나는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또는 ‘나’라는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신체적, 정신적, 가정적, 사회적, 정치적, 민족적 등의 체계들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메타인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규정한 또는 규정된 것을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즉 정체성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근대적 의미에서의) 엄밀한 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양한 성적, 계급적, 민족적 등의 정체성들은 그것들이 일단 하나의 언어화된 기표로서 고정되어 표현되는 이상, 그 기표들과 그 기표가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기의들의 분류, 연결, 할당 등은 불가피하게 권력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권력의 문제가 검토되는 이상 나의 자기인식은 타자와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인식이 될 수 없다. 푸코가 그의 고고학적이고 계보학적 작업'들'을 통해 드러내 보이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분류되고 연결되고 할당된 정체성들은 정확하게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일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상의 답은 “나는 나이다”라는 동어반복밖에는 없다. 만약 그러한 동어반복을 해체하고 보다 더 상세하게 규정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나’의 ‘누구임’이 아니라 ‘무엇임’을 탐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남자/여자다, 나는 외향적/내향적이다, 나는 장애인/비장애인이다, 나는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다 등등.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언어화된 정체성이 아니라 그런 질문을 던지는 ‘나’의 에토스(Ethos)를 통해 표현되는, 언어화될 수 없으면서도 ‘나’의 행동과 습성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체성에 대한 복잡한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에 관해 한 가지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명제가 있다면, 그것은 앞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정체성은 본인이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규정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규정됨의 논리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개인의 정체성이란 '호명'된 것에 불과하다는 다분히 단편적으로 해석된 알튀세르적 주장도 보인다. 그러나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의 경험들을 통해 한 개인이 가지는 또는 드러내는 정체성에 주변 환경이 미치는 영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정체성에 내재된 이런 규정됨의 논리는 그것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정체화하는 주체로서의 '나'를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정체화의 효과 내지 가능성 자체에 제약을 가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규정됨의 논리와 정체화의 논리는 그러나 평소에는 그 갈등이 잘 드러나지 않은 채 있다. 왜냐하면 일상의 생활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런 갈등이 직접 불거질 일은 잘 없기 때문이다.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출근해 일하고 퇴근해 TV를 보며 맥주 한 캔을 홀짝이다가 잠드는 일상에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정체성 속의 두 충돌되는 힘들의 갈등이 드러날 일은 많지 않다. 심지어 두 가지 논리가 각자 모순된 주장을 하더라도 그 모순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동시에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히 발생하는 어떤 사건들 속에서 정체성 속에 내재한 두 논리는 엄청난 파열음을 일으키게 되는데, 특히 강남-좌파와 남성-페미니스트는 현재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가장 큰 두 파열음을 명칭하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으로 인해 다시금 불거진 강남-좌파에 대한 논쟁과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 속에서 등장한 남성-페미니스트에 관한 논쟁은 정치공학이나 계급이나 젠더의 문제를 넘어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정체성은 내부의 두 논리, 그러니까 정체화의 논리와 규정됨의 논리 사이의 갈등은 화해가능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체성 속에 언제든지 터질 준비가 된 시한폭탄처럼 내재된 정체화의 논리와 규정됨의 논리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갈등과 때로는 모순은 결코 극복될 수 없으며, 나아가 그런 두 논리를 이어보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강남-좌파와 남성-페미니스트이다. (이하의 논의에서 나는 강남, 좌파,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마치 고정된 기표-기의의 체계인 것처럼 다룰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그런 정체성이 고정되고 단일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체성 속의 두 논리 사이의 화해불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서두에서 나타난 것처럼 정체성은 그렇게 단순하게 명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먼저 강남-좌파의 경우를 살펴보자. 한국 사회에서 '강남'이라는 단어가 표상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 사회의 엘리트 또는 기득권 계급으로 편입된 이들이 거주하는 장소(topos)이다. 다시 말해 '강남'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막대한 양의 자본(여기서 자본은 단지 통장에 찍힌 돈을 의미하지 않는다)을 축적한 이들이 한국 사회 내에서 공유하는 정신적(때로는 실재적) 고향을 말한다. 이 '강남'이라는 고향에서 그들은 새롭게 자본들을 창출해내고 그것들을 세습하며 카르텔을 구축해나간다. 그리고 이렇게 강남에서 일생동안 쌓아온 경험들(이러한 경험들은 반드시 의식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은 비-강남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한들 세대를 거쳐 연속적으로 실천되고 이어질 수 없는 경험들이다. 바로 이런 경험들이 만들어내는 '강남'이라는 정체성은 설령 그들이 강남에서 벗어나 '좌파'를 말하고 실천하고자 하더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제약으로 작용한다. 그들에겐 돌아갈 고향이 있다. 그러나 '좌파'는 바로 그러한 고향을 상실한 자들, 또는 애초에 돌아갈 고향이 없는 자들의, 그런 자들을 위한, 그런 자들에 의해 생성되고 마련된 정체성이다. 여기서 '좌파'라는 단어를 부르주아에 대비되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체성이라는 식으로 도식적으로 정의를 하진 않을 것이다. '좌파'와 대비되는 '강남'이라는 단어가 그 내부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조국과 나경원은 분명 다르다) '좌파'라는 단어 역시 그런 식의 도식으로 단순히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것은 '좌파'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정체성(들)에 포함된 것은 '강남'과는 상반되게도, 자본을 축적하고 재생산하며, 세습 가능한 장소의 부재, 따라서 그러한 경험의 부재이다.


 남성-페미니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페미니즘은 그 단어에서도 드러나듯이 기본적으로 여성, 그리고 여성의 경험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남성-페미니스트라는 자들에게 결여된 것이 바로 이 여성의 경험이다. 단적으로 남성은 그 어떠한 생리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도대체 여성의 경험을 경험하지 못하는 데 여성의 경험 속에서 나오는 페미니즘이라는 관점을 어떻게 취할 수 있는 것인지, 그래서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남성-여성이라는 낡은 도식을 제거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신체적 차이(물론 그 신체 역시 자연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신체와 '너'에게 주어진 신체의 차이)가 낳는 상반된 경험과 그로부터 나오는 정체성에 대한 제약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극복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정체화의 논리가 규정됨의 논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강남-좌파와 남성-페미니스트는 원칙적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논리적인 차원에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넘어 강남과 남성의 정체성이 표출되는 에토스의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좌파와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이 자리 잡을 공간이 협소하거나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방법이 충돌하는 두 단어 중 어느 하나의 정의를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다. 김어준이 "돈 많으면 좌파 하면 안 돼?"라고 한 것이나, 모두가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추구하면 페미니스트라는 주장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방법이 입증하는 것은 두 정체성의 화해가능성이기는커녕 규정됨의 논리의 승리이다. 두 경우 모두 느슨하게 재정의되는 단어는 규정됨의 논리를 대표하는 강남과 남성이 아닌 정체화의 논리를 대표하는 좌파와 페미니스트이다. 더구나 이런 재정의는 좌파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근본적으로 내포하는 의미를 희석시키거나 제거해버린다. 강남-좌파의 세계관에서 좌파는, 부재하는 장소(고향)에 대한 치열하고도 근본적인 성찰은 사라지고 단지 좀 더 튼튼한 사회복지시스템의 구축과 같은 문제들에 대한 관심으로 축소된 의미가 된다. 또한 남성-페미니스트의 세계관에서 페미니즘은 더 이상 페미니즘이 아닌 그저 여성에 중점을 두는 휴머니즘으로 바뀌어버린다. 즉 페미니즘에 핵심적인 여성의 관점, 여성의 경험에서 시작된 관점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남은 무조건 우파와 짝지어져야 한다거나 남성은 무조건 잠재적 한남이라는 식의 손쉬운 결론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내몰릴 필요가 없다. 강남-좌파는 불가능하지만 좌파의 지향을 공유하는 강남은 가능하며, 마찬가지로 남성-페미니스트는 불가능하지만 페미니즘의 지향을 공유하는 남성은 가능하다. 이를 좌파적-강남, 페미니스트적-남성이라고 하자.


 강남-좌파와 남성-페미니스트는 불가능하다면서 좌파적-강남과 페미니스트적-남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후자에 있어서 좌파적과 페미니스트적이라는 단어가 정체성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좌파적-강남과 페미니스트적-남성에게 있어 좌파와 페미니즘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기보다는 그것들의 지향점에 대한 동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자신이 강남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좌파적 비전에 동의할 수 있으며, 남성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지향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동의는 정체성의 수준으로까지 확장되지는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동의는 단지 발화되고 쓰인 이론으로서의 좌파와 페미니즘의 논리와 그 결론에 대해 긍정하고 그들이 더 많이 발화하고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것에 그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좌파적-강남과 페미니스트적-남성은 강남-좌파와 남성-페미니스트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진다. 좌파적-강남과 페미니스트적-남성은 결코 자신을 좌파 또는 페미니스트라고 함부로 정체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좌파의 기획, 페미니즘의 기획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운동들의 선봉에 나서지 않는다. 물론 이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행동들을 조정해 나가려는 의식적인 노력들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좌파 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에 직접 참여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좌파나 페미니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파적-강남과 페미니스트적-남성은 소극적이거나 부정적 의미에서의 실천에 머무르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위와 같은 명칭은 단지 적극적 실천을 회피하는 보신주의적 행태를 포장하려는 가면에 불과할 것이다. 이들은 분명 어떤 종류의 적극적 실천을 한다. 그것은 좌파와 페미니즘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는 실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좌파적 비전과 페미니즘적 지향이 더 많이 말해지고, 들려지고, 쓰이고, 보일 수 있도록, 따라서 좌파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이 더욱더 활동적일 수 있도록 사회 내에 공간을 확보하고 확장하려는 실천이다. 요컨대 더 많이 환대하기. 이러한 실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좌파와 페미니즘을 위한 공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배제의 논리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투쟁이다. 특히나 배제의 논리가 가장 크게 기대고 있는 지능의 불평등에 대한 주장과의 투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좌파 좀비, 페미는 정신병 등의 발화들은 바로 이런 지능의 불평등한 분할선을 그으려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분할선이 그어지면, 동일한 지능을 갖고 있지 않은, 그래서 '우리'와는 다른 불평등한 자들은 보일 필요가 없고, 그들의 목소리는 들릴 필요가 없게 된다. 따라서 좌파적-강남과 페미니스트적-남성의 실천은 바로 이런 지능의 불평등에 맞서 지능의 평등을 입증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천은 좌파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실천이 자신을 좌파 또는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 좌파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이 단순한 소수의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 실제로 무언가 변혁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동의에 기반한 실천들을 확보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좌파적-강남과 페미니스트적-남성은 어쩌면 불충분한 개념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또는 단순히 리버럴의 다른 표현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좌파적-강남, 페미니스트적-남성과 같은 개념화는 정체성 내부에 존재하는 화해불가능한 두 논리, 즉 정체화의 논리와 규정됨의 논리의 충돌 속에서 그것을 은폐하거나 어느 한쪽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좌파 또는 페미니즘의 지지자들을 확보할 수 있는 유용한 개념화이다. 나아가 이런 개념화는 리버럴이나 단순한 다원주의가 아니다. 좌파적-강남과 페미니스트적-남성은 중립적이고 기술적으로 쓰였다고 자부하는 자유나 평등에 대한 고답적인 관념들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명확한 편향을 가지고 실천한다. 그람시가 제시한 진지전의 개념에 빗대자면, 이들은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구축된 진지의 내부에서 집총을 거부하는 병역거부자들이다. 겸손하면서도 단호하게, 자신에게 솔직하면서도 타자에 총부리를 겨누지 않으려는 이 병역거부자의 삶, 이런 삶을 살아내는 것이 좌파로도 페미니스트로도 정체화하지 못하는 내가 걸어가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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