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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Aug 05. 2019

잘라라, 지도(指導)하는 그 손을

 최근 한국과 일본을 둘러싸고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루에도 수십수백 개씩 쏟아지는 말의 홍수 속에서 배움이 짧은 나는 열심히 소화는 데만도 하루가 훌쩍 가버린다. 그러나 소화불량처럼 도저히 삼켜지지 않고 오히려 반감이 들게 하는 말들이 있다. 그 반감은 내가 삼킨 말들을 얼른 게워내고 싶게 만든다. 이 글은 바로 그 토사물에 대한 기록이다.


 7월 1일에 일본의 무역 공격으로 본격화된 한일 간의 분쟁 와중에 한국 내부에서는 대중적으로 일본불매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해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본불매운동이 확산되는 만큼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불문하고 많은 지식인들의 비판 또한 거세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들은 물론 다양한 근거들을 가지고 전개되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지식인들의 이러한 비판들이 근본적으로 대중혐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식인들의 비판들 속에서 대중은 주체성을 상실한 채 감상적인 민족주의에 휩쓸려 떼 지어 돌아다니는 무리에 가깝다. 근본적으로 대중은 무능력한 존재다. 쉽게 흥분하고, 대화와 토론보다 어떻게든 투쟁 속에서 해결하고자 하며, 상대를 악마화하는 대중의 행태는 미개인의 그것과 같다. 그리고 대중의 그런 행태는 언제나 실패하기 마련이다. 러므로 대중은 언제나 지식인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 이제 우리 지식인들이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 우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 자신들을 위해서도 지도는 필수적이다. 대중이 우리 지식인들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다고? 그것은 대중이 무지하기 때문이다.


 일본불매운동에 대한 지식인들의 이러한 대중혐오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된다. 첫째는 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이다. 일본불매운동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러한 불매운동이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까 일본불매운동은 냉혹한 경제논리와 치밀한 외교전에 대해 감상적 민족주의로 치기 어린 대응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불매운동이 전략적인 효과가 있기는커녕 자해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에 쏟아지는 대중적인 반발들에 대해 친일과 반민족이라는 조악한 프레임을 덮어 씌우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의 말을 들어보자.

원칙적으로 내셔널리즘을 전부 똑같이 부정하는 일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내셔널리즘이란 (중략) 심정의 표현 수단으로써 국가라는 말이 채용된 상황,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의 심정은 지극히 다양하여, 권력 지향이나 타자에 대한 악의의 경우도 있으며, 반권력 지향이나 타자에 대한 연대 소망도 있다. 그런 개개의 문맥을 무시하고 일괄적으로 내셔널리즘이라는 총칭을 부여해, 그것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에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일본불매운동은 분명 민족과 애국이라는 민족주의적 표현을 채용한다. 그러나 그때 민족과 애국으로 표현되는 민족주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심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애초에 왜 일본불매운동이 시작되었는가? 강제징용에 관한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일본의 반발이 그 시작점이 아닌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분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불법적 행위로 피해를 입은 개인의 존엄성과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확히는 아베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존엄성과 권리를 부정하려 한다. 일본불매운동과 그 원동력인 반일감정은 단순히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을 배척하려는 얄팍한 민족주의적 감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심정, 그러니까 부정의에 의해 훼손된 피해자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민족, 애국, 한일전 등의 이름들은 바로 그 심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들인 것이다. 요컨대 일본불매운동에서 한국과 일본은 단지 그 지리적, 인종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타자가 겪는 근본적인 부조리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상징적 기표인 것이다.


 그런 심정의 표현으로서 일본불매운동이 시작되고 진행되어 온 이상, 그것이 실제로 일본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등의 전략적인 효과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는 최우선적 고려사항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심정이 해소될 수 있느냐이며, 그것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반일감정은 일본불매운동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둘째는 대중의 일본불매운동이 '소비'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대중은 소비의 중단이 얼마나 소극적인 수단에 불과한지 모른다. 대중은 소비의 중단이 그다지 효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대중은 소비의 중단과 대체재의 탐색이 여전히 자본주의적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른다. 대중의 불매운동은 단지 일차적인 사고방식에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며 더 근본적인 해결 방식을 모른다. 무지하기 때문에 대중의 일본불매운동은 역설적으로 대중의 무능력함을 드러낸다. 문제를 해결할 줄 모르는 무능력함. 일본불매운동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런 식으로 대중의 무지와 무능력을 강조하며, 적절한 해결책을 아는 자신들의 지도에 따를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지식인들의 해결책이란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합의를 강조하는 리버럴한 대책이나 궁극적으로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해 아베 정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코즈모폴리터니즘적인 태도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다.


 나는 소비의 중단이라는 형태의 일본불매운동이 가지는 한계들에 대한 비판이 어느 정도 적실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유와 행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소극적인 의미의 거부이며,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장기적인 효과를 가져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 무지하고 무능력한 것이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못한다. 불매운동은 오히려 그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직접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무지의 소산도 아니고, 무능력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불매운동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 때문에 채택된 것이다. 누구나 언제든지 어느 장소에서도 어떤 것에 대해서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실천하고 참여할 수 있는, 광범위한 다수의 힘을 끌어모을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불매운동이다. 민족주의의 언어가 채택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지식인이라는 이들이 제시하는 그 어떤 대안도 일본불매운동만큼 광범위한 자발적인 정치적 참여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보이진 않는다.


 전후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베헤렌, ベ平連)이라는 전국적인 시민조직에 참여했던 작가 오다 마코토(小田實)는 이렇게 말한다.

목표는 (베트남 반전이라는) 가능한 한 구체적이며 좁은 한 가지로 한정하고, 그 목표 아래에서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인간을 모은다.


 일본불매운동 역시 불매운동이 가지는 여러가지 한계점들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고 실천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따라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인간을 모으기 위해 선택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굳이 일본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도 없다. 불과 3년 전 촛불집회에서 우리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목표 하에서 연인원 16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는가. 그때 역시 많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탄핵이 불러일으킬 혼란들을 운운하며 대중적 요구에 마지못해 따랐을 뿐이다. 나는 작금의 일본불매운동이 촛불집회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하여 소비의 중단이 어떤 정치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기껏해야 민족주의적 감성의 일회적 표출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부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소비나 소비의 중단은 그 자체로는 정치적 의미를 갖진 않지만, 어떤 맥락에 놓이는가에 따라서 그것들은 또한 정치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랑시에르의 말마따나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은 없지만 어떤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일본불매운동은 바로 그 정치적인 것에 해당한다. 그것은 단지 일본 상품을 경제적 이유에서 소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앞서 논의된 심정, 그러니까 국가가 불법적으로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를 짓밟은 것에 대해 사죄하고 응당한 배상을 하여야 한다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심정에서 비롯된 일본불매운동은 단지 경제적인 효과를 넘어 동아시아에서 정치적인 감성의 재배치(타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의 정서에서 타자에 대한 연대와 사랑으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1달 동안 지속되어 왔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이 운동이 일회적이고 유행에 불과한 것이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검토할 가치도 없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대중은 무조건 옳거나 일본불매운동이 항상 옳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에 대한 무조건적인 상찬 역시 대중혐오의 다른 일면일 뿐이다. 일본불매운동이 내세우는 민족주의가 그 표면적인 이미지의 강렬함 때문에 그것이 나타나게 된 본질적인 심정을 가리는 현상이 분명히 존재하며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현상을 단지 일부만의 문제라고도 타자화하지 않겠다. 민족과 애국 같은 민족주의적 수사를 채용한 이상, 불매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폭언을 퍼붓거나 인종차별적 표현을 내뱉는 등의 행태들이 불거질 위험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더구나 표면적으로 드러난 민족주의에 기생하려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수단으로써의 민족주의가 아닌 그 자체 목적으로서의 민족주의를 증폭시킬 위험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위험을 지적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불매운동 자체를 반대하거나 그에 동참하는 대중들을 경멸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또한 궁극적으로 문제의 해결책은 서로 간의 대화와 토론, 그리고 양국 시민사회의 연대 속에서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나란히 아시아의 선진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파트너십을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결책이 작금의 일본불매운동과 양립이 불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나아가 대중혐오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지식인이라는 사람의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대중혐오와 그로부터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는 목자(者)의 역할이어서는 안 된다. 중국학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자기를 두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실행할 수 있든 말든, 그런 것은 상관없이, 자기만이 높은 곳에 머물며 권위의 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지도자다. 지도자들은 루쉰에게 '데모크라시'를, '사이언스'를, 자유를, 평등을, 박애를, 정의를, 독립을, 번영을 주려고 했다. 그는 믿지 않았다.


 대중의 무지와 무능력을 혐오하며 그들을 지도하려는 지식인들을 대중은 믿지 않는다. 그런 불신은 어떤 정교한 논리적 사유의 결과라기보다는 차라리 역사적 경험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본능과 같은 것이다. 대중을 가르치려는 지식인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기어코 대중을 배신하고 만다는 경험. 그리고 그러한 불신이 표면으로 떠오를 때, 반지성주의는 지식인을 넘어 세계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간다. 그러므로 역사학자 이시모다 쇼(石母田正)의 말처럼 지식인은 높은 곳에서 민중에게 요청하지 않고, 겸손하게 함께 작업을 하는 그런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으로 하여금 모든 비판적 기능을 봉인한 채 대중에 투항하라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비전을 제안하고, 때로는 대중과도 대립하고 논쟁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인이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 지식인의 태도는 계몽군주의 그것이어서는 안 된다. 평등을 믿고 그에 의거해 행동하는 것, 그것은 분명 매 순간마다 회의감이 들게 할지도 모른다. 불평등의 정념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제1의 역할이다. 이시모다 쇼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 대한, 대중에 대한 존경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어려운가, 이 곤란함을 몸에 스미도록 체득하는 것이, 우리의 첫걸음입니다.

 나는 이 글에서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이분법적인 개념항들을 많이 사용했다. 지식인과 대중, 내셔널리즘과 코즈모폴리터니즘 같은 대립항들은 실제로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개념들이 아닐뿐더러, 이러한 이분법적인 대립구도 자체가 이미 일정한 권력적 효과를 의도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이분법적 논의가 지식인과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우위에서 대중과 내셔널리즘의 우위라는 전도된 형태의 권력구조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분법 자체를 넘어서 인간의 평등이라는 개념 속에 그것들을 종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분법을 사용한 것은 지식인과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우위에 대한 담론들이 가지는 대중혐오와 불평등의 재생산을 지적하기 위한 방법적인 필요성 때문이다.


 오다 마코토의 말이다.

모든 인간이 모든 순간에 위대한 것은 아니다, 바른 것은 아니다, 성실한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인간이라도 어느 때에는 위대할 수 있다, 올바를 수 있다, 성실할 수 있다, 아름다울 수 있다.


 나는 인간에 대해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지식인과 대중, 내셔널리즘과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넘어서, 인간이 위대할 수 있는 순간, 올바를 수 있는 순간, 성실할 수 있는 순간, 아름다울 수 있는 순간들을 창조하고 발명해내는 것, 다시 말해 기존의 주어진 위치나 정체성에서 이탈해 인간의 평등에 대한 신념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러한 순간들에 보다 많은 인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연대하고 논쟁하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서 우리가 진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평등을 실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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