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이 Jul 21. 2019

정치와 윤리

 마루야마 사오(丸山 眞男)는 1946년에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超国家主義の論理と心理)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후 일본에서 엄청난 주목을 게 된다. 그의 이 논문은 1945년 이전의 일본, 특히나 태평양전쟁 시기인 1940년대 초반의 일본을 지배하던 초국가주의가 어떤 논리와 심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지를 개괄하고 있다. 짧게 요약하자면 서양의 근대를 넘어선 신문명을 열어가야 한다는 다분히 도식된 헤겔적인 논의가 일본에서 주장되었지만, 사실 일본은 근대국가를 초월한 초국가는커녕 진정한 의미의 근대조차 갖추지 못한 채 봉건적 사유와 생활에 머물러 있었으며, 또한 단순히 봉건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봉건성과 조잡한 형태의 근대성이 결합해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주의적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다. (국가주의는 그 이름에서부터 드러나듯이 민족국가라는 근대적 발명품이 기본적으로 전제되기 때문에 단순히 중세적 봉건주의에서는 쉽사리 도출되기 힘든 사유이다.)


 마루야마의 논문은 기본적으로는 전후 일본에서 도대체 일본은 왜 패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마루야마 나름의 해답(그리고 많은 전후의 일본인들이 공유하는 해답)으로 제시된 것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정치와 윤리가 어떠한 관계를 맺을 때, 그 둘이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데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평등을 양산하는지를 보여준다.


 정치와 윤리는 비록 그것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인간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세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또한 그 둘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매우 긴밀하게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나아가 정치와 윤리의 이런 관계에 대한 논의는 굉장히 복잡하고도 다양한 양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논의들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것은 (또는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은), 정치와 윤리를 어떤 방식으로 정의할 것인지이다. 만약 그런 정의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정치와 윤리 그리고 그 둘의 관계에 대해 추상적인 또는 피상적인 논의밖에 주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루야마는 논문에서 정치와 윤리에 관해 직접적으로 정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그의 논문에서 전개된 논리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치와 윤리를 나름대로 정의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정치란 어느 정도 현실정치(Realpolitik)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정치란 주권자의 주권적 결단에 의해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선언하는 행위인 것이다. 반면 윤리는 진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선(善)과 악(惡)을 결정하는 문제이다. 요컨대 정치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정하는 것이라면, 윤리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를 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가 물론 충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정치와 윤리의 관계에 대한 마루야마의 논의를 살피고 그것이 현대에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에 큰 결함이 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치와 윤리는 근현대 동아시아에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여기서 나는 단순히 정치와 윤리의 관계가 아닌 근현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동아시아라는 지역적 배경을 덧붙였다. 그것은 마루야마 마사오가 바로 그 시대의 그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동시기 서양과의 비교 속에서 그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근현대라는 시대적 구분과 동아시아라는 지역적 구분은 그 자체로 나름의 정의를 요하는 역사적인 작업이지만, 여기서 그 모든 것을 논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며, 다만 이 글을 읽으며 자신의 체험들과 연관 지어 사유함으로써 그 시대적, 지역적 의미를 발견해나가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다면 좋겠다.


 마루야마는 "윤리와 권력의 상호이입"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정치와 윤리의 상호이입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상호이입은 "국가가 국체(國體)에서 진선미(眞善美)의 내용적 가치를 점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국가주권이 정신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을 일원적으로 점유"하기 때문에 "국가주권이 윤리성과 실력성의 궁극적 원천이며 양자의 즉자적 통일"임을 의미한다.


 앞서 밝혔듯이 정치는 진리, 그러니까 옳고 그름의 결단과 관련된 것인 반면에 윤리는 선함과 악함의 판단과 관련된 것이다.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정치와 윤리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와 윤리는 그 유사성이 많은 만큼 차이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가벼운 예로, 국가는 사기죄라는 법적 명칭으로 거짓말과 그로 인한 이익을 취하는 것을 옳지 않은 것이라고 규정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거짓말을 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예시가 아주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정치와 윤리, 다시 말해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엔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정치와 윤리가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버린 곳, 즉 윤리와 권력이 상호이입된 곳에서는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이 하나로 통합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국가가 진리로 규정한 것은 동시에 선한 것이 되고, 국가가 비진리로 규정한 것은 동시에 악한 것이 된다. 더불어 이런 곳에서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는 두 가지 근원, 다시 말해 내면의 윤리적 판단과 외부의 법적인 규제의 성립 근거인 정신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이 일원적으로 통합된다. 요컨대 정치와 윤리의 상호이입은 국가주권에게 정치적, 법적 결단을 넘어서 윤리적 결단까지 가능한 권리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에서 '악의 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악마와 천사의 비유를 들어 문재인 정부를 공격한 것은 정치와 윤리를 뒤섞은 언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치와 윤리의 이러한 상호이입은 심각한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근현대 동아시아에서는 실제로 현재까지도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하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바로 이런 상태, 그러니까 정치와 윤리가 구별될 수 없을 만큼 섞여버린 상태가 1945년 이전의 일본에서 지배적인 상태였음을 밝히면서, 정치와 윤리의 상호이입이 불러일으키는 파괴적인 결과들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다.


 먼저, 정치와 윤리의 상호이입은 국가로 하여금 양자의 가치를 모두 가지고 있는 권력적이고 정신적인 실체로 존재하게 함으로써 "학문도 예술도 그러한 가치적 실체에 의존하는 길 외에 달리 존립할 수 없다." 즉 학문에서도 예술에서도 그 나름의 자율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될뿐더러, 학문과 예술은 그 자신의 존재론적인 정당화의 근거를 오로지 국가의 윤리적 결단에서만 찾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학문과 예술은 곧바로 옳지 않은 것이자 악한 것으로 규정되어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국법이 절대가치인 국체로부터 흘러나오는 한, 자신의 타당성의 근거를 내용적 정당성에 근거지움으로써 어떠한 정신영역에도 자유자재로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정치와 윤리가 상호이입된 곳에서의 "도의는 그런 국체의 정화(精華)가 중심적 실체로부터 동심원을 그리면서 세계를 향하여 져나가는 데에서만 성립"하게 된다. 다시 말해, 국가가 단지 정치적 주권체에 머물지 않고 윤리적 실체로서도 존재하게 되면서 세계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러한 정치적이고도 윤리적인 실체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라는 거리에 따라 불평등하게 위계 지어진다는 것이다. 교황으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의 정교한 위계질서를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더욱이 그 같은 궁극적 실체에 가까운 것이야말로, 개개의 권력적 지배만이 아니라 전체 국가기구를 운용해가고 있는 정신적인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은 현재에 들어서는 바티칸을 제외하면 유형적인 의미의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정교한 위계질서는 단지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 그 자체가 국가를 조직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원리로써 기능하지 못한다. 반면 정치와 윤리가 상호이입된  곳에서 국가의 주권은 곧 윤리적 완전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국가가 규정하는 구분과 불평등은 정치적 권력의 유무와 다소를 넘어 완전한 선으로부터 완전한 악까지의 단계 순으로 조직된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바로 패망 이전의 일본이 그런 방식으로 조직되었다고 보았고, "따라서 거기서의 국가적•사회적 지위의 가치규준은 그 사회적 직능보다도 천황으로부터의 거리인 것이다." "니체는 '거리의 파토스(Phatos der Distanz)'라는 것으로 모든 귀족적 도덕을 특징짓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비천한' 인민과는 떨어져 있다는 의식이 그만큼 최고가치인 천황에 가깝다는 의식이 의해서 한층 더 강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정치와 윤리가 상호이입된 곳에서 불평등은 임의적인 것이 아닌 필연적인 것이 되고, 나아가 평등에의 지향과 불평등에 대한 저항은 악마의 속삭임이자 언제나 진압되어야 할 악의 준동에 불과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마지막으로, 정치와 윤리의 상호이입은 독선주의와 분파주의(Sectionalism)를 낳는 토양이 된다. "그와 같은 파주의는 흔히 봉건적(Feudalistic)이라 성격 짓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봉건적 할거성은 각자 자족적•폐쇄적 세계에 틀어박히려는 데서 배태되지만, 그와 같은 분파주의는 각 분야가 각각 종적으로 궁극적 권위에 직접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가치 지워지고 있다." 다시 말해, 정치와 윤리가 상호이입된 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진리와 좋음의 근원인 주권체의 말을 전하는 사도라고 믿게 되고, 그로 인해 타자에 대한 불신•배척과 자신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 자신은 궁극적 실체와 합일화하려는 충동을 끊임없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봉건적인 그것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고 침략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자신이야말로 궁극적 가치체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 곳에서, 타자에 대한 인정은 곧바로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고, 타자에 대한 부정이 곧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정치와 윤리가 상호이입된 곳에서는 홉스와는 다른 의미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끊임없이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고 올라서서 하늘에 오르려는 애벌레들의 모습을 그린 동화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정치와 윤리의 상호이입은 이처럼 파괴적인 결과들을 가져다. 하지만 동시에 그 파괴적인 힘은 정치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정치와 윤리를 뒤섞게 하려는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충동은 진보와 보수, 또는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한국의 극우 반공 세력이 얼마나 정치와 윤리를 뒤섞은 언어를 통해 리버럴과 좌파를 탄압해왔는지는 여기서 굳이 논의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국의 현대사 그 자체가 명백한 증거다. 그러나 리버럴이나 좌파는 정치와 윤리의 상호이입이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그 칼에 누구보다 많은 상처를 입었던 세계사적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치와 윤리의 상호이입은 결코 좌파적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과 일본 간의 무역분쟁 와중에 나온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발언들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현재는 리버럴 민주당의 문재인 정부에서 일하는 조국 수석이 "이적"이나 "친일파"를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 자신과 그가 속한 조직이 "종북", "빨갱이"같은 단어에 의해 고통받은 기억이 있다면, 그런 발언은 자제했어야 했다.


 나는 일본 불매운동으로 대표되는 반일 민족주의가 감성적이라든지, 비합리적이라든지 하는 비판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척, 쿨한 척하는 것은 자신의 무책임과 무능을 포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 일본의 책임은 빼놓고 한국 정부만 공격하는 보수(이들이 보수가 맞기는 한 지도 의문이지만) 언론과 야당의 행태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일 민족주의와 문재인 정부의 대응 방식이 정치와 윤리를 뒤섞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상대는 자유롭게 날뛰는데 우리는 손발 묶어놓고 싸우라는 거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물론 당장의 일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다. 그리고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와 윤리를 상호이입시키는 것은 꽤 쓸만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강력함에 차츰 맛을 들이다 보면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중독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파멸의 길을 내달릴 수밖에 없다. 1945년 이전의 일본이 그랬듯이. 이번엔 아닐거라고? 난 자신만은 예외라고 말하는 이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수주의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