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대학교에서는 총여학생회의 폐지를 둘러싸고 학생총투표가 이루어진 바 있다. 두 번의 총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첫 번째는 총여학생회의 개편을 두고 이루어진 총투표였으며, 두 번째는 총여학생회의 폐지를 두고 이루어진 총투표였다. 이 두 번의 총투표에서 총여학생회 측은 모두 완벽하게 패배하였다. 두 번의 투표에서 총여학생회 측의 득표율은 각각 14.96%와 18.24%에 머물렀다. 총투표가 성사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총여학생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중운위는 만장일치를 지향하며 그 과정에서의 논의와 합의를 중요시하는 의결기구입니다. 그러나 제56대 중운위에서 지켜진 민주주의의 원칙은 ‘다수결’ 뿐이었습니다. … 해당 투표는 다수의 힘으로 학내 소수자 단체를 없애고자 하는 월권이며, 총여학생회는 그러한 과정 전체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유권자의 목소리가 없는 총투표 요구와 실시에서 찬성 혹은 반대는 무의미합니다. 이에 … 학생총투표 과정 전반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여학생회원이 아닌 … 재적생을 포함하는 학생총투표는 다수의 횡포이고 폭력입니다.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이루어진 학생총투표를 실시함으로써 다수의 결정만으로 한 자치단체의 존폐를 결정하는 선례가 … 학생사회에 남게 되었습니다. … 다수의 결정으로만 운영되는 공동체는 오히려 반민주적인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현재의 학내에서 모든 의견들이 동등한 무게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이 현실은 결코 민주주의라고 명명될 수 없습니다.”
장면 2.
최근 정의당에서는 심상정 후보와 양경규 후보 간의 당대표 경선이 진행되고 있다. 심상정 후보는 “정의당에겐 담장 밖을 넘어설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며 “과감한 대전환의 결단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그는 “정의당을 더 개방하고, 더 혁신해서 5만 당원 넘어서서 300만 지지자를 당원으로 만들겠다”며, “정의당의 빛나는 전통인 당원총투표를 바탕에 두면서도 개방형 경선제를 도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심상정 후보의 주장에 관해 제기된 비판들은 다음과 같다.
“대중의 요구를 따라야 한다는 헛소리. … 대중 정당으로의 이행은 진보 정당의 '퇴행'이다.”
“그때그때의 단기적 이해관계의 풍랑에 의존하는 기회주의적 항해를 하자는 것인지? … '진보'를 포괄하는 대중정당은 이미 민주당이 하고 있는 거다. 현실적으로 법률안 만들어서 당장의 문제나 빨리 해결해줄 대중정당이 필요할 뿐이라면 솔직히 정의당이 민주당과 표를 두고 경쟁하면서까지 그 자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단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나는 총여학생회의 폐지에 반대하며, 두 번의 투표에 대해 모두 반대표를 던졌다. 또한 나는 양경규 후보가 주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담대한 전환을 지지하며, 그가 당대표가 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장면 속에서 느껴지는 다수주의에 대한 혐오만큼은 한 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좌파가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수주의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 다수주의는 인구의 다수가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우선권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나 이념을 뜻한다. 그러니까 다수주의는, 어떤 공동체의 결정에 있어서 모두의 의견을 집계한 후에 그중 다수의 의견을 그 공동체의 결정이라고 우선적으로 선언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수주의가 제도적 형태로 표출된 것이 바로 여러 사람들 간의 의견을 조율할 때 흔히 사용되는 다수결이다.
물론 다수주의와 다수결에 따르더라도 그 구체적인 절차와 결정방법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예컨대 선거제도를 살펴보자. 투표를 통한 선거야말로 다수주의와 다수결이 구현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지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단순다수제(무조건 당해 선거에서 제일 많은 득표를 한 사람을 당선자로 하는 방법)를 선택할 수도 있는 반면, 절대 다수제(결선투표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50% 이상의 득표를 하여야 당선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절차와 방법이든, 그것들은 어떠한 결정이라도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마찬가지로 모든 결정은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는 다수주의의 원칙을 구현한 것이다.
이러한 다수주의가 곧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는 또 하나의 중요하고도 거대한 문제이지만, 지금 이 글에서 그것까지 포함한 논의를 전개하기에는 글이 너무 늘어지기에 다소 부적절한 감이 있다. 그러나 자세하게 논의를 전개하지 않더라도 다수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는 비교적 쉽게 그려질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이견들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공유되는 의견이 있다면(그것은 또한 민주주의의 어원상 의미이기도 한데), 민주주의는 다른 누구가 아닌 데모스(Demos)가 통치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데모스와 다수는 분명 같지 않다. 그것은 데모스와 다수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론적 의미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데모스는한국어로는 민(民) 또는 민중이라는 단어로 보통 번역된다. 이러한 번역에서도 드러나듯이 데모스는 그 정치적, 계급적, 사회적, 문화적 속성들이 역사적 시공간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특정될 수 있다. 반면 다수는 말 그대로 많은 수를 의미한다. 다수라는 말속에는 숫자의 많음을 제외한 그 어떠한 존재론적 함의도 담겨 있지 않다.심지어 숫자의 많음조차도 어떤 숫자가 한 공동체에서는 다수이지만 다른 공동체에서는 소수일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다.
물론 다수주의와 민주주의는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왔다. 데모스가 가지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무기야말로 바로 그 데모스의 수, 다시 말해 엘리트들에 비해 압도적 다수로 존재하는 데모스의 수이기 때문이다.그렇기에 데모스와 다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현실적으로도 어느 정도그렇다.민주주의의 역사가 다수주의의 역사와 매우 유사한 경로를 밟아온 것도 바로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모스와 다수는 분명 구분되는 개념이며, 그에 따라 민주주의와 다수주의 역시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분명히 차이를 가진다.
이러한 다수주의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은 천재적 개인의 자유로운 창발성을 중시하는, 그리고 그것을 무엇보다도 제1의 가치로 내세우는 사람들에 의해 노골적으로 표시되었다. 에드먼드 버크, 알렉시 드 토크빌, 존 스튜어트 밀 등 일군의 학자들은 근대의 정치가 다수의 정치, 그러니까 다수주의로 흐르는 것을 막고자 고심했다. 그들은 근대의 세례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쏟아붓는 왕정복고주의자들이나 노골적인 신분제적 불평등을 주장하는 자들과 같은 편에 설 수는 없었으나, 어쨌든 민주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된 다수주의가 다수의 이름으로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개인을 질식시키는 것에 극도의 공포감을 가졌다. 따라서 그들은 다수가 넘을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불평등을 개발하고자 했으며, 바로 그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척도로 제시된 것이 '지능'이다. 이성과 감성 또는 문명과 야만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라는 자들이 내세우는 불평등의 위계는 정확히 진리와 정치를 이해할 수 있는 지능과 그럴 수 없는 지능의 분할선을 따라 형성된다.
반면 좌파적 해방의 기획들은 다수주의에 어느 정도 친연성을 띠고 있다. 그것은 좌파적 기획이 마치 스탈린이나 마오 시기의 소련과 중국 같은 전체주의를 목표하기 때문이 아니다. 19세기 말에 등장하기 시작해 20세기 말엽에 해체된 현실사회주의라 불리는(그러나 그 실질은 국가자본주의에 다름 아닌) 국가들의 모습은 (비록 좌파적 기획의 맹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될 수는 있을지언정) 좌파적 기획과 거의 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적으로,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의 모습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인 것처럼 좌파적 기획의 목표 역시 개인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관계 맺으며 생활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좌파적 기획은 바로 그러한 공동체가 현재에 부재함을 폭로하고, 따라서 현재의 부조리를 바꿔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앞에서 논의된 자들과 인식을 달리한다. 그러므로 좌파적 기획은 불가피하게 현재에 대한 변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수단으로 다수의 힘을 통한 혁명을 주장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좌파적 기획은 다수주의와 얼마간 맞닿아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다수주의가 같지 않은 것처럼 좌파적 기획과 다수주의 역시 같은 것이 아니다. 앞서 좌파적 기획이 다수의 힘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지만, 보다 엄밀한 표현은 의식화된 다수의 조직화된 힘이다. 따라서 좌파적 기획은 다수주의를 필요로 하지만 그때의 다수는 두 가지 요건을 갖춘 다수를 의미한다. 의식화와 조직화.요컨대 좌파는 자신의 기획을 추진하기 위한 힘을 다수로부터 얻어내야 하며, 동시에 그러한 다수는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다수여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 그러니까 좌파가 단순히 다수를 필요로 하는 것을 넘어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다수를 요구하는 지점에서 좌파적 지식인들이 다수주의에 대한 혐오를 거리낌 없이 표출하면서 다수주의가 좌파적 기획의방해물인 것처럼 비난을 퍼붓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글의 맨 앞에 제시된 두 개의 장면에서 총여학생회의 논리나 심상정 후보를 비판하는 자들의 논리는 바로 이러한 다수주의에 대한 혐오가 좌파적 지식인들에게서 나타난 전형적인 사례이다.
좌파적 지식인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이런 다수주의에 대한 혐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아이러니한 성격을 가진다. 먼저, 그것은 좌파적 기획을 추동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반을 스스로 부정하게 만든다. 다수를 필요로 하면서 다수주의를 혐오한다? 도대체 다수가 아니면 그 어디에서 좌파가 자신의 기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물론 의식화와 조직화 역시 좌파적 기획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수와 동떨어져 존재한다면, 그리고 다수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단지 사변적 공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좌파적 지식인들의 다수주의에 대한 혐오가 가지는 두 번째 아이러니한 성격은 (그리고 아마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점인데) 그것이 바로 앞서 논의된 근대적 반동주의자들(버크, 토크빌, 밀과 같은)의 불평등의 논리를 좌파적 형태로 재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수주의를 혐오하는 좌파적 지식인들은 다수주의와 다수결이 만들어내는 반동적인 결정들에 대해 다수의 무지를 탓한다. 예컨대 지배이데올로기에 포획되었다든지,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든지 등 어떤 표현이든 간에 다수의 무지 때문에 유식자들(뜻 그대로 아는 자들)인 자신들의 좌파적 기획이 실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대체로 두 가지 상반되는,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결국 동일한 두 가지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첫 번째 선택은 다수에 대한 혐오로 인해 본인들만의 조직 속으로 침잠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새로운(그러니까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다수가 필요하다며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반향실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정신승리. 또 다른 선택지는 목자(牧者)의 길을 걷는 것이다. 즉, 새로운 다수를 창출해내겠다며 계몽을 위한 길을 걷는 것이다. 대중에게 언어를 제시한다던지, 대중을 일으켜세운다든지의 표현은 바로 목자의 언어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라클라우와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이 종종 인용되곤 하는데, 좌파 포퓰리즘에서 중요시되는 대중의 재구성은 목자의 인도에 따른 계몽과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자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좌파 포퓰리즘이 계몽주의의 좌파적 버전이 아니라는 것은 포퓰리즘이라는 단어의 뜻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두 가지 선택은 언뜻 상반되어 보이지만 결국은 동일한 전제 위에 기반되어 있다. 좌파적 기획의 진리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르는 정치적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다수 또는 대중의 무지와 무능, 그러니까 '지능'의 불평등함. 근대적 반동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던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능력과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분은 다수주의를 혐오하는 좌파적 지식인들에 의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좌파적 지식인들의 행태는 새로운 형태의 바보 만들기에 지나지 않고, 다수를 또는 대중을 애 취급하는 것이다. 요컨대 다수주의에 대한 혐오는 평등을 지향하는 좌파에게서 불평등이 다시 솟아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좌파는 반동의 논리에 굴복하고 만다.
좌파의 다수주의에 대한 혐오는 단순히 그것이 좌파의 자기부정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좌파가 의미 있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끝없는 실패의 나락으로 몰아넣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다수주의에 대한 혐오는 곧잘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정치형태, 예컨대 선거와 투표, 대의제 등에 관한 다양한 형태의 비판과 때로는 부당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비난을 가져온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현대의 제도화된 정치체제에 대해 제기된 좌파적 비판들은 분명 온당하고, 실제로 제도화된 정치가 1인 1표의 원칙을 제외하면 도대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이 좌파가 현재의 제도 하에서 패배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단순한 비판을 넘어 실질적인 변혁을 가져오기 위해서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이다. 그리고 좌파가 다수주의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순간 좌파는 끝없는 패배만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반복된 패배 속에서 쉽게 드러날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다.불평등의 논리를 되새기면서 자기들끼리 졌잘싸라며 정신승리하거나, 푸코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조잡하게 섞어서 권력의 주변부에 머물며 작은 일탈에 만족해버리거나.때론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매번 지기만 하는 정당을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지지해줄 사람은 다수가 아니라 극히 소수이다.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수를 만들기 위한 전략을 고심하기보다 갈라치기를 통한 선명화만 고수하는 페미니즘은 고립 속에서 근근이 그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소수를 위한 좌파는 절대 승리할 수 없다.그리고 그 당연한 결과로 좌파적 기획을 위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
누구보다 선명한 이념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노동당이나 녹색당이 과연 자기들만의 학습과 활동조직 이상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의당이 내세우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좌표 설정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정의당에 필요한 것은 승리의 경험이다. 특히나 선거에서의 승리가 절실하다. 단일화나 보수의 분열이나 명망가의 개인 역량에 의존한 승리 말고 오롯이 정당의 힘으로 일구어내는 승리 말이다. 그러한 승리의 경험치가 누적될 때에야 비로소 정의당의 이념적 좌표 역시 대중적으로 각인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승리는 일상의 문제들을, 그러니까 대중적 요구들을 비록 때로는 불만족스럽고 불완전하더라도 해결해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더 착하고, 더 성실한 민주당 되기가 아니다. 당장의 임박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정당이 어떤 수로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변혁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설령 그렇다고 한들 누가 그들을 신뢰하겠는가.
오해하지 말길. 나는 다수주의가 무조건 옳다거나, 다수주의에 따른 결과가 반동적인 퇴행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도 트럼프도 다수주의적 제도인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더구나 좌파가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포기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좌파적 기획을 위한 의식화와 조직화라는 두 가지 수단은 좌파에게 있어서 필수적이다. 다만 내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 수단에 치중한 나머지 그것이 사용되는 배경의 다수주의를 혐오하지 말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수를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작업을 불평등과 계몽적 태도를 전제하지 않고 수행할 것인가이다. 태극기 부대에서 종북세력까지, 한남에서 페미니스트까지 모두가 대중이다. 그리고 모두가 평등하게 1표를 행사한다. 좌파는 바로 이 명징한 사실 위에서 시작해야 한다. 때로는 다수주의에 의해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좌파가 승리하는 방법 또한 다수주의에서 찾아져야 한다. 다수주의에 대한 섬세한 고려가 없는 좌파는 항상 실패하고 마는 좌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