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난 후에 남아있는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어떤 소설은 끝없는 유쾌함을 주는가 하면, 어떤 소설은 말라버린 줄로만 알았던 연애세포를 깨우면서 사랑을 하고 싶게 만든다. 또 어떤 소설은 슬픔과 분노를 주는 한편, 어떤 소설은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만든다.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라는, 200 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이 소설이 나에게 남긴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외로움이다. 지독하리만큼 익숙하고 두려운 외로움.
외로움. 사전적 의미로는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을 뜻한다. 그러니까 외로움이란 의지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보통 이런 의미의 외로움 또는 고독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이미지가 가능하다. 하나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실존주의적 외로움의 이미지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제외하고 그 어떤 것도 참조하지 않는, 그러니까 나의 실존을 무한히 긍정하면서 고독을 감수하고, 그 끝이 죽음임을 알면서도 길을 개척해나가는 그런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 주는 외로움은 이러한 이미지의 외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이미지로서의 외로움이다. 즉 지금까지의 나를 지탱해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세상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소외된 채 죽음을 향해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외로움. 이러한 이미지의 외로움에서 남는 것은 삶에 대한 허무와 무감각함뿐이다.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 주는 외로움은 바로 이런 종류의 외로움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
사노가 결국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외로움이 만들어내는 허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한 외로움이라면 후미오 역시 똑같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외로움, 그것이 후미오의 삶을 무감각하게 만들었으며, 후미오와 사귀었던 수많은 여성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떠나게 만들었고, 결국은 세쓰코 역시 그에게서 떠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후미오와 사노의 선택은 달랐다. 후미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가는 반면, 사노는 결국 자살한다.
같은 외로움임에도 불구하고 사노만이 자살한 이유는 그의 외로움이 후미오의 외로움과 비교해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노가 자기 자신에게 찍은 배신자라는 낙인, 다시 말해, 혁명을 누구보다 열렬하게 주장하지만 막상 혁명의 순간에는 도망쳐버리는 혁명가라는 자기 인식은 사노로 하여금 자신의 외로움을 단지 허무하고 공허한 것이 아니라 구토가 나오고 역겨운 것으로 만든다.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생각할지를 생각할 때 사노에게 남는 것은 혁명을 두려워하는 당원, 즉 ‘나는 배신자다’라는 것뿐이었기에, 사노에게 있어 삶은 그런 낙인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그로 인해 구토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차라리 무(無)인 삶은 하루하루를 무(無)로 살아가면 된다. 그러나 끝없는 자기파괴와 구토로 점철된 삶은 생에의 의지에 대한 어떠한 자리도 만들어줄 수 없다. 그렇기에 사노는 자신을 지켜왔던 모든 것에서 자신 스스로 도망쳐 떨어진 외로움 속에서 삶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인물들이 나름의 외로움을 안고 있음에도 특별히 사노의 외로움이 내게 남겨진 이유는 나 역시 나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을 새겼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조금씩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결국은 홀로 되어버리는 경험들. 얼마나 자주 동지들의 곁을 떠나왔고, 얼마나 자주 광장에서 나는 뒤돌아섰던가. 그런 경험들 속에서 나는 배신자였다. 물론 변명을 하자면 아예 변명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론적 차이 때문에, 때로는 실천에 대한 회의 때문에, 때로는 사랑 때문에, 때로는 그저 사적인 다툼 때문에. 그러나 무엇 때문이건 결과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현장에서, 광장에 있는 반면, 나는 홀로 현실이라는 안온한 안락 속으로 침잠하는 배신자가 되었다. ‘나는 배신자다.’
하지만 사노와 같은 외로움 속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노의 자살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지지할 수는 없다. 생명은 소중하기 때문이라거나 지금까지 삶의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채우면 된다는 식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 때문이 아니다. 배신자라는 낙인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자기혐오와 구토를 껴안고 상처 입은 채 한 걸음씩 내딛는 것, 즉 외로움을 고스란히 품에 안고 삶을 견뎌나가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외로움과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과연 사노의 삶은 배신자라고만 정의할 수 있을까? 물론 그는 배신자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한 인간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살아왔었다. 그의 노력이란 것이 매우 미약하기 때문에 소네를 포함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었음은 물론 세상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결국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변화의 한 증거를 소설이 나온 1960년대와 지금 2019년 사이 50년의 시차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여성 인물들은 매우 수동적인 객체로 머물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주체인 남성의 작용에 따른 반작용적 주체에 머물러 있다. 단순히 사랑으로 표현되기에는 명백하게 폭력적인 남성들의 행위들 속에서 여성들의 반응은 혼자서 삭이거나(유코는 두 번이나 낙태를 해야 했고 그 모든 '처리'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 사랑이 식어서 떠난다는 식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도 불충분하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여성들의 결론이었다. 세쓰코가 삶을 살아보겠다며 후미오를 떠나서 도호쿠의 작은 시골 마을로 갔다는 이례적인, 그러나 여전히 다소간에 반작용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야기 속에서 여성은 거의 대부분 부차적이고 남성의 행위에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세쓰코가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학습하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조차 남성에 대한 사랑(세쓰코의 경우 노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여성혐오적인 내용들이 버젓이 소설에서 중심적인 축들 중 하나로 등장하고 또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1960년대로부터 50년 동안,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여성혐오적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비판할 수 있게 되었고, 꼭 그만큼 세상 역시 매우 느리지만 조금씩 꾸준히 진보해왔다. 즉, 50년 전에는 화(和)의 영역이었던 것이 이제는 불화(不和)의 영역으로 넘어왔고, 새로운 화(和)로 나아가기 위한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역사 발전의 필연성이라든가 목적론적 발전법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에 이성은 없다. 역사뿐만이 아니다. 세계와 국가를 비롯한 어떤 방식으로 규정된 공동체에도 이성은 없다. 이성은 오직 개인에게 있을 뿐이다. 인류사적 역사에서부터 개인적 역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역사는 수많은 개인들의 부단한 투쟁,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의 연대 속에서 만들어져 온 것이다. 헤겔의 말마따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다시 말해, 역사에 대한 필연적이거나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은 역사를 오직 회고적인 방식으로 바라볼 때에만 유효할 뿐이다. 그것은 역사의 미래에 대해 어떤 전망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개인들의 투쟁과 연대는 그 자체로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 속에 있는 이성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성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간에 투쟁하고 연대하는 과정 속에서 역사가 창조된다.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은 신도, 자연도, 국가도, 당도, 그 어떤 조직도 아닌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이 가진 이성의 평등이다. 그래, 나도 창조자다!
이제 사노가 (그리고 내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지금까지의 삶은 배신자라는 단 하나의 이름만으로 채색될 수 없다. 더욱이 지금까지의 삶에서 배신자였다면, 앞으로의 삶에서는 창조자일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을 속죄의 과정이라고 하여도 좋다. 배신자라는 낙인 속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외로움 속에서 그래도 어떻게든 이성의 목표를 향해 십자가를 지고 한 발짝씩 나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를 창조자로 만든다. 단순히 다시 당원이 되어 활동가로서 살아가는 그런 방식이 아니어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광장에서 그들의 곁에서 같이 투쟁하고 연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를 창조자로 만든다. 또다시 배신자가 될지도 모른다. 외로움과 자기혐오를 영원히 떨쳐버릴 수 없을지 모른다. 이성의 목표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회의가 들 수도 있다. 또는 영원히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견뎌내 살아가며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원죄를 대속하지 못한다. 단지 배신자라는 낙인이 주는 고통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게 해 줄 뿐이다.
우리의 나날은 배신의 연속이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의 (살아갈) 나날은 창조의 삶일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생각할까? ‘나는 배신자다. 그리고 창조자다.’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이는 그 누구도 아닌 배신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