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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Sep 08. 2019

주권자와 주권'자': 민주주의의 불가능성

Rousseau-사회계약론

 안전을 위해 우리의 모든 자유를 희생하고, 현재 상황에 감사하면서 불평등에 복종할 것을 외치는 홉스를 향해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지하 독방에서도 안전하게 살 수 있다. 이것으로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는 것인가?” 안전에 대한 홉스의 집착에 대해 루소는 그것이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설령 안전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이 공동체의 제1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루소는 홉스에 맞서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폴란드 정부론』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안식과 자유는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선택해야만 한다.” 안식 없는 자유와 자유 없는 안식 중에 루소는 물론 전자를 선택한다.


 이처럼 홉스와 결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자연상태에 대한 재구성이다. 만약 자연상태가 끝없는 폭력과 전쟁으로 가득 찬 곳이라면, 폭력 자체를 즐기는 광인이 아닌 이상 홉스적 결론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소는 자연상태를 폭력으로부터 구해내고자 한다. “원시적 독립상태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평화상태나 전쟁상태를 구성할 만큼 그들 사이에 지속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자연적으로는 결코 적이 될 수 없다.” 자연상태는 결코 폭력과 전쟁의 상태가 아니다. 폭력과 전쟁은 어떤 물적 권리, 즉 소유권을 전제하며, 이러한 권리는 기본적으로 사회상태가 창설된 이후에야 정립될 수 있는 것이므로, 폭력과 전쟁은 사회가 수립된 곳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오히려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선하다고 말한다. 이때 선함은 도덕적 의미에서 선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도덕 역시 사회상태에서만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립된 개인에게는 어떠한 도덕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루소가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선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연상태에서 폭력과 전쟁을 낳는다고 홉스가 주장하는 사회적 악함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요컨대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광대한 자연 속에서 각자 자신의 힘을 통해 살아갈 뿐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런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사회를 조직하는가? “자연상태에서 인간의 보존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의 저항력이, 개인이 자연상태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힘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때 원시상태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으며, 인류는 존재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소멸할 것이다.” 개인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부딪히게 되면서 인간은 서로 모여 협력함으로써 더 크고 강력한 힘을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인간은 자유냐 예속이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일단 회합을 통해 큰 힘을 만들게 되면, 그 힘이 정상적으로 사용되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그 힘의 명령에 예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선택하면 큰 힘을 포기해야 하고, 예속을 선택하면 자유를 상실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한다. 홉스라면 고민 없이 후자의 길을 걷겠지만, 인간의 자유를 “인간 공통의 것으로서 인간본성의 한 결과”라고 여기며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의 자격, 인간성의 권리와 그 의무까지 포기하는 것”임을 굳게 믿는 루소로서는 자유와 예속이라는 모순된 두 단어를 조화시켜야 했던 것이다. 요컨대 “공동의 힘을 다해 각 회합원(associé)의 인격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하며, 각자가 모두와 결합함에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기에 전만큼 자유로운 회합형식을 찾는 것”, 이것이 루소가 사회계약을 통해 이루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사회계약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계약을 개별자와 개별자 사이에서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식의 사회계약은 한 개별자를 다른 개별자에게 예속시키게 된다. 루소는 이런 계약에서 두 개별자의 관계는 인민과 지도자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노예의 관계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루소의 사회계약에서 개별자는 누구와 계약하는가? 바로 자기 자신과 계약한다. 그런데 이런 계약은 개별자가 자신 과 결합할 수 있는 계약일지언정 공동체 전체, 그리고 그 부분의 다른 개별자들과 결합할 수 있는 계약이 아니지 않은가? 루소는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개별자가 자기 자신과 공동체를 완전히 동일하게 만들어내는 작업에 착수한다. “각 회합원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함께 공동체 전체로 완전히 양도된다. 우선 각자가 자신을 전부 주기에 계약조건이 모두에게 공평하며, 조건이 모두에게 공평하기에 어떤 사람도 계약조건이 타인에게 부담이 되도록 만드는 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게다가 이것은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양도여서, 최대로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며 어떤 회합원도 요구거리를 가질 수 없다. …  마지막으로, 각자는 모두에게 자신을 주기에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개별자의 계약 상대가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전체라면, 자유와 예속은 모순되지 않고 어울리게 된다. 그렇게 창설된 공적 인격은 전체로서 생각하고 전체로서 의지한다. 요컨대 “우리 각자는 공동으로, 자신의 인격과 모든 힘을 일반의지(volonté genérale)의 최고 지도 아래 둔다.” 바로 이 일반의지를 가지게 되는 공적 인격을 루소는 국가 또는 주권자라고 말한다.


 이 주권자 안에서 각 계약자의 “개별적인(particulière) 인격”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주권자의 일반의지를 공유하는 자아를 가진, 전체와 구분 불가능한 부분으로서의 구성원들이 차지한다. 그리고 각 개별자들은 “자기 자신과 계약함으로써 어떤 이중의 관계에 결부된다. 즉 그는 개별자들에 대해서는 주권자의 구성원이며, 주권자에 대해서는 국가의 구성원이다.” 이로써 사회계약은 자유와 예속을 성공적으로 화해시키게 되고, 이렇게 성립된 국가 또는 주권자 안에서 인민은 자연적이고 무제한적인 자유를 잃는 대신 시민의 자유와 소유권 그리고 도덕적 자유를 얻게 된다. 


 이러한 루소의 논리 속에서 우리는 주권자의 개념이 가지는 난점을 회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지 모른다. 주권자는 국가 전체를 대표해 전체의 관점에서 주권적 결단을 내리는 주체이다. 주권은 그 스스로 주권적 결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주권자는 단순히 주권적 결단을 실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권적 결단 그 자체를 내리고 해석하는 자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권자는 언제나 그 주권자의 역할을 떠맡는 부분적인 인격적 특수성이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수행되어야 할 주권적 결단에 개입할 위험을 안고 있다. 즉 주권자는 주권‘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주권자 개념에 내재된 인격적 속성을 제거하는 것은, 주권자 또는 국가가 자신이 행하는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었다. 만약 주권자가 그 자신의 특수성을 대변하면, 다른 특수성들은 주권자의 지배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주권자로부터 권리를 회수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소는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주권‘자’의 자리에 일반의지를 지닌 공적 인격을 앉히고자 한다. 왜냐하면 일반의지가 공적, 그러니까 모두에게 공통적이기 위해 일반의지는 모든 개별의지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럼으로써 항상 전체로서 파악하고 결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우리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불가능성만을 보게 된다. 만일 주권‘자’의 자리가 단 하나의 인격 또는 소수의 인격들에 의해 차지된다면, 주권자는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결단을 내릴 수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소수의 인격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결단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군주정 또는 과두정(귀족정)이다. 그러나 주권‘자’의 자리에 모든 인민을 앉히게 되면 우리가 보게 될 것은 플라톤이 경멸한 것처럼 단 하나의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다채롭고 혼란스러운 주권자이다. 이 무질서와 혼란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일반의지는 이 온갖 인민들의 민주적인 무질서와 혼란을 종합할 수 없다. 그러한 종합의 시도야말로 개별의지들을 억누름으로써 일반의지로 하여금 더 이상 일반의지일 수 없게끔 만든다. 루소의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소는 민주주의가 하나의 법적-정치적 통치체제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랑시에르가 올바르게 지적한대로 민주주의는 통치불가능성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종합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이런 통치불가능성으로부터 통치-그것은 필연적으로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다-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남게 된다. 루소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을 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권자가 주권‘자’일 수밖에 없다는 난점을 해결하고자 할 것이 아니라, 주권‘자’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이 누군지를 끝없이 되물어야 한다. 일반의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주권자의 주권적 결단은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는가? 주권‘자’의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자, 그래서 인민이 되지 못하는 자는 누구인가? 요컨대 주권자의 주권‘자’적 특수성을 폭로하는 것.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스캔들의 폭로를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폭로를 통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보편적인 특수성을 향해 진보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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