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Marx-경제학-철학 수고, 첫 번째 수고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표한 1776년 이후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경제학은 가장 시대적으로 근대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는 경제에 무관심했다거나 경제에 관련된 연구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어의 ‘oiko nomos(οἰκονόμος)’에서 ‘economy’가 유래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물론 그 뜻은 심대하게 변형되었지만, 경제에 관한 관심은 꾸준히 존재해왔다. 그러나 그때 경제는 철학-보다 정확히는 인간학이라고 할 수 있을-의 한 분과 또는 정치의 한 분과로 존재해왔을 뿐이다. 경제학이 처음 등장할 때도 앞에 정치라는 꼬리표를 달고 정치경제학으로 불렸다는 것에서도 역시 경제학이 독립된 체계를 가진 학문으로 분리된 것이 그리 오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 다시 말해 경제학이 철학, 인간학, 정치로부터 분리되어 마치 그 모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작동하는 학문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 지점에서 현재 우리가 겪는 모든 경제적인–동시에 철학적이고, 인간적이고, 정치적인-불행의 씨앗이 잉태되었다. 이 주장에 대해 다행히(?) 우리는 그리 복잡한 논증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생생한 경험을 한 바 있다. 불과 10여 년 전에 발생한 금융위기와 그 대처과정은, 그 누구보다 유능하고 중립적이며 합리적이라고 자신하는 경제학이 꼭 그만큼 무능하고 파당적이며 비합리적임을 증명한다. 경제학은 스스로를 다른 모든 것들과 절연시킴으로써 자신을 추상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신학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경제를 이루는 많은 부분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경제 전체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 의해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바로 노동이다.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성을 제거해야 하지만 노동은 인간과 분리불가능하다. 그리고 경제학은 자신의 신학적 기획을 위해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거나 억압하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의 첫 번째 수고를 통해 자본주의의 구조를 설명하지만 그러한 설명이 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경제학이 행하는 은폐와 억압에 대한 폭로이다.
마르크스는 국민경제학이 인간을 “노동동물로만, 문자 그대로 육체적 욕구로 환원되는 동물로만 알고 있다”고 말한다. “국민경제학이 프롤레타리아, 다시 말해서 자본과 지대 없이 순수하게 노동에 의해서 그리고 일면적이고 추상적인 노동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를 그저 노동자로 간주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국민경제학은 노동자가 노동을 할 수 있으려면 각각의 말(馬)과 마찬가지로 꼭 그만큼 벌어야만 한다는 명제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국민경제학은 노동하지 않을 때의 노동자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고찰을 형사재판, 의사, 종교, 통계표, 정치, 거지 단속 경찰에 떠넘긴다.” 요컨대 인간성의 외주화. 이러한 국민경제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리카도는 그의 저서(『지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들은 생산의 작업장일 뿐이며, 인간은 소비와 생산을 위한 기계이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의 자본이다. 경제법칙은 세계를 맹목적으로 지배한다. 리카도에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생산물이 전부이다.” 이처럼 경제학은 아주 노골적으로 “인간들에 대한 무관심”을 표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랑스러운 학문의 성과로 전시한다. “국민경제학자가 움직이는 유일한 수레바퀴는 소유욕, 소유욕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전쟁, 경쟁”이다.
이렇게 인간이 삭제된 경제학, 그리고 그에 의해 지배되는 자본주의적 세계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영혼 없는 인간의 양산이다. 자본주의 속에서 자본가는 오로지 이윤을 극대화하고 그로부터 자본을 재생산하는 일에 몰두한다. 또는 그렇게 강요하는 경제법칙에 맹목적으로 복종한다. 자발적이든 법칙에 종속적이든 자본가의 이러한 행동은 노동 운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노동 운용은 자본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계획과 심사숙고에 따라 규제되고 관리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계획과 운용에서 그들이 설정하는 목적은 이윤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어떻게 하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효율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며, 이러한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노동임금을 가능한 한 낮출 수 있는 데까지 낮추고 노동시간을 가능한 한 늘릴 수 있는 데까지 늘리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노동환경에 제약을 거는 것은 단 하나인데, 바로 노동자의 신체적, 생식적 재생산이다. 요컨대 노동자가 내일의 노동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의, 그리고 후세대의 노동자를 낳고 기를 수 있을 만큼의 임금과 시간만을 남겨놓고 모조리 자본가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착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그 사회의 부의 상태와는 무관하다. 바로 이 절대다수 노동자들의 불행과 고통을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학은 노동자와 노동에게서 인간성을 제거하고 추상적인 상품으로 그것도 “가장 비참한 상품”으로 만든 것이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의 말을 빌려 경제학과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다수가 고통 받는 사회는 행복하지 않으며, 가장 부유한 사회 상태도 이러한 다수의 고통을 초래하며, 국민경제(일반으로 사적이익의 사회)는 이러한 아주 부유한 상태를 초래하므로 사회의 불행이 국민경제의 목적이 된다.” 이때 국민경제가 자본주의를 의미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경제학과 자본주의는 단지 노동자의 궁핍을 가져오기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소외를 가져오기 때문에 더욱더 신학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소외는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1. 노동자의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노동생산물을 생산한다. 즉 어떤 물질적 재료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이 생산물과 가치를 온전히 전유하지 못하고 “생산물의 가장 적고 필요불가결한 부분”만을 가질 뿐이다. “그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그가 인류를 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노예계급을 번식시키는 데 필요한 만큼만.” 이로써 노동자에게 자신의 생산물은 낯선 존재로 존재하게 되며, 그로부터 소외된다. 2. 노동자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노동이 단지 “배고픔이라는 가혹한 필연성을 면하기 위해서” 수행되는 곳에서 노동은 단지 고통스러운 강제노동에 불과하게 된다. 나아가 그의 노동활동 전체는 아주 잘게 쪼개져 자본가의 ‘과학적’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경제학자들은 이 ‘과학’을 분업이라고 부른다. 3. 노동자의 인간의 유(類)적 본질로부터의 소외. “인간은 대상적 세계의 가공에서 비로소 자신을 현실적인 하나의 유적 존재로서 확인한다.” 바로 이 생산이 노동이며, 따라서 노동은 인간의 유적 본질을 이룬다. 그런데 노동생산물과 노동활동으로부터 소외는 곧 노동 자체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며, 그로인해 노동자는 인간에게 고유한 유적인 신체적, 정신적 능력, 요컨대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된다. 4. 노동자의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앞의 세 종류의 소외로부터 생겨나는 직접적인 귀결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가 발생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는] 일체의 관계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실현되고 표현된다. 그러므로 소외된 노동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인간은 자기 자신이 노동자로서 존재하는 척도와 관계에 따라 다른 사람을 본다.” 요컨대 노동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전면적으로 소외되는 것은 노동자가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존재하기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으로부터도 전면적으로 소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지배 아래에서 인간은 결국 노예상태에 존재하게 된다. 인간은 철저하게 소외되어 단지 생존을 위한 노동에만 종사하게 된다. 물론 경제학과 자본주의는 이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경제에 무지한 자들이여, 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경제는 오로지 전문적으로 훈련받고 숙달된 우리만이 해결할 수 있다. 경제는 우리에게 맡겨라. 기다려라. 시간이 지나 더 많은 부가 축적되면 모두가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믿어라. 그것은 법칙이다.’ 이것은 과학자의 언어라기보다는 사제의 언어에 더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를 망치는 것은, 나아가 우리의 인간성과 정치와 철학 모두를 망가뜨리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경제 그 자체라는 것을 이미 보았다. 신뢰를 잃은 사제에게, 더구나 미래라는 마약으로 노예들을 진정시키려는 자에게 무엇을 더 기대하는가? 이런 이유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해방이라는 정치적 형식으로 노예상태에서 사회의 해방을 선언한다. 물론 “이는 노동자의 해방만을 문제 삼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자의 해방 안에 보편적·인간적 해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속에는 인간의 예속 상태 전체가 포함되어 있고 모든 예속관계는 이러한 관계의 변형이고 귀결일 뿐이므로 노동자의 해방 속에 보편적·인간적 해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