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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Sep 16. 2019

다시, 사회주의를 실천할 때

Karl Marx-경제학-철학 수고, 세 번째 수고

 경제학과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망가뜨리는지를 고발한 마르크스는 단지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경제학과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폐해를 시정하는 방식으로 사회가 개선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그는 케인지언 또는 개량된 사회민주주의와 명백히 결별한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세 번째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기초인 사유재산 개념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사유재산의 지양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물질적이고 직접적으로 감각적인 사유재산은 소외된 인간적 생활의 물질적·감각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경제학과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서 인간은 모든 인간성을 상실한 채 소외된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를 대체하기 위해 경제학은 사유재산 또는 부를 더 이상 “인간 바깥에 존재하고 인간에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과 합체되고 인간 자신이 사유재산의 본질로 인식”되도록 만들었다. 다시 말해 “국민경제학이 사유재산을 인간 자신의 본질 속에 옮겨 놓고” 이것이 자연이라고,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상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인간의 이러한 타락과 부패, 문명의 하수구의 오물이 인간의 삶의 장면이 된다. 완전히 부자연스러운 방임, 부패한 자연이 그의 삶의 장면이 된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은 인간적 생활의 획득으로서, 모든 소외의 적극적 지양이며, 그러므로 (중략) 자신의 인간적인, 다시 말해서 사회적인 현존으로 인간이 귀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의 지양이 “조야한 공산주의” 하에서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적극적인 공동체적 존재로서 정립하고자 하는 사유재산의 저열함의 현상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조야한 공산주의 속에서 분명 사(私)유재산은 명시적으로는 부정되고 이는 공(共)유재산으로 바뀐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는 “사유재산에 보편적 사유재산을 대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조야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이라는 사적 형식에서 벗어나 보편적 매춘으로 들어가듯이, “부의 전체 세계, 다시 말해서 인간의 대상적 본질의 세계 전체가 사적 소유자와의 배타적인 결혼관계에서 벗어나 공동체와의 보편적 매춘관계로 들어간다. 이 공산주의는-인간의 인격성을 도처에서 부정함으로써-바로 그것의 부정인 사유재산의 철저한 표현일 뿐이다.” 그것은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그가 단지 플라톤식의 이상국가를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되살리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20세기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실은 마르크스가 비판한 조야한 공산주의에 불과함 역시 알 수 있다.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기 소외인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으로서, 그리고 따라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획득으로서 공산주의”이다. 이런 공산주의 하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며, “모든 인간적 감각들과 속성들의 완전한 해방”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더 이상 경제학과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극도의 절약과 금욕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난다. 경제학과 자본주의는 인간의 인간적인 모든 생활을 더욱 적게 하고 이를 통해 더욱 절약하여 자본의 재생산에 투자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국민경제학자가 그대의 생명과 인간성에서 탈취해 간 모든 것, 그 모든 것은 국민경제학자는 그대에게 화폐와 부로 주며, 그대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그대의 화폐는 할 수 있다.” 공산주의는 바로 이런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인간성의 회복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 인간 발전의 목표-인간적 사회의 형태-가 아니다.” 물론 공산주의는 “부정의 부정으로서 긍정이며, 그에 따라 인간 해방과 회복의 현실적인, 임박한 역사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계기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이런 특성은 여전히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긍정하기보다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만 겨우 긍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충분하다. “사회주의로서 사회주의는 본질로서의 인간과 자연의, 이론적·실천적·감각적인 의식에서 출발한다. 현실적 생활이 적극적인, 더는 사유재산의 지양, 공산주의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인간의 현실인 것처럼 사회주의로서 사회주의는 적극적인, 더는 종교의 지양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공산주의가 그 개념상 항상 사유재산이라는 인간성의 부정을 부정하는 방법으로만 성립될 수 있는 데 반하여, 사회주의는 곧바로 인간과 인간성을 긍정한다. 즉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참조함으로써만 성립할 수 있지만 사회주의는 그러한 참조가 불필요한, 따라서 오로지 인간이 인간 자신만을 참조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 발전의 목표-인간적 사회의 형태-”인 것이다. 그곳에서 인간이 타인, 그리고 자연과 맺는 관계는 화폐라는 획일화되고 보편적인 매개를 통하는 관계가 아닌,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와만 등으로 교환”할 수 있으며, 각 개인의 “현실적·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인 관계이다.


 이렇게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닌 긍정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헤겔의 변증법과 철학 일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에서 그 사유의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부정의 부정 속에 놓여 있는 긍정 또는 자기 긍정과 자기 확증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대립에 붙잡혀 있는 긍정으로서, 자기 자신을 의심하며 따라서 증명이 필요한 긍정으로서, 그러므로 자신의 현존을 통해 자기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고 승인받지 못한 긍정으로 파악되므로, 감각적으로 확실하며 자기 자신에 바탕을 두는 긍정이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대립된다.”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의 지양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긍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과 증명 속에서만, 그러니까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만 긍정되는 반면에 사회주의는 온전히 자기 자신에 근거를 두고 부정의 부정이라는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곧바로 자기 자신을 긍정한다. “이러한 매개를 지양함으로써 비로소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는 적극적 인간주의가 생성된다.” 진정한 인간 사회의 모습은 바로 이런 적극적 인간주의에서 비롯된 사회주의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의 사상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사유된 공산주의로도 충분하다. 현실적 사유재산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공산주의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지금에도 유효하다. 좌파에게 부족한 것은 이론이 아니다. 마르크스 이후, 그리고 마르크스 너머의 이론들은 한 인간이 전부 다 소화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차고 넘친다.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공산주의적 실천, 나아가 사회주의적 실천이다. 의식 속에서, 추상 속에서, 그리고 관념 속에서 수없이 세상을 짓고 무너뜨리길 반복하는 것은, 물론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단 한 명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단 한 블록의 현실 속 구역도 바꾸지 못한다.


 경제학과 자본주의는 역사를 보라 말한다. 소련은 이미 해체됐다,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나 다름없다, 북한은 거지꼴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등등. 그들은 현실 사회주의가 해체된 이후 거침없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종언을 고하며 마치 자신이 절대정신의 출현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사회주의를 말하는 자들에게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줄 모르는, 이상만 좇고 현실은 모르는 관념론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문자적 형식으로서의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공산주의/사회주의는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일한 현실이고 대안은 없다고 말하지만, 그리고 그런 주장이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파산선고를 받았음에도 그들이 여전히 헤게모니로 작동하게 하는 근거지만, 대안은 있다. 대안이 없는 것은 그들의 인식, 추상, 관념 속에서 뿐이다. 그들이야말로 관념론자다. 지금이 다시 사회주의를 말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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