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篇
한 할머니가 치매를 앓고 계신다. 슬하에 자녀도 없고, 부모도 노쇠하여 도움을 줄 수 없었으며, 도우미를 고용할 돈도 없다. 그래도 운이 좋아 남매가 다섯이다. 장남인 오빠가 할머니를 돌보기로 했다. 할머니를 보려면 왕복 4시간을 이동해야 하지만, 장남의 도리를 다 하고자 불편을 무릅쓴다. 보상은 없다. 다만 사랑이 몇 방울 담긴 희생이 있을 뿐.
치매라는 병은 할머니가 생을 다 할 때까지 머릿속을 헤집어 기억을 먹어치울 것이다. 그마저도 끝나면 껍데기뿐인 몸 마저. 병마는 오빠의 불편일랑 아랑곳하지 않는다.
몇 년 간의 돌봄 끝에, 지친 오빠는 할머니를 돌봐줄 요양원을 알아본다. 남매들은 요양원에 지불할 돈을 십시일반 모은다.
곁에서 병마가 희망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괴롭다. 치매는 특히 그런 것이, 감정 컨트롤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갑자기 화를 내거나 우울해진다.
"걔는 잘 있지? 이제 몇 살이랬지?" 하루에도 이런 똑같은 말을 수 십, 수 백 번씩 반복한다.
조금 증상이 심해지면, 똥오줌을 못 가리게 된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는 말이 떠도는 것은 이 병 때문일 것이다.
보호자나 간병인은 감사나 사랑을 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 결국 자신을 돌보는 사람이 누군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래가 없다는, 어떻게 해도 나락이 찾아올 거라는 확신.
그 확신이 반드시 현실로 찾아온다. 이 병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그래서 남매들의 선택은 자연스럽다. 전문기관에 아웃소싱하는 것. 그것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마음.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 누가 모르겠는가. 그들도 할 만큼 했다.
요양원에 보낼 수 있는 돈이 있다는 것으로 감사한 것이다. 자신의 돈을 나의 남매를 위해 사용하는 것. 그것도 사랑의 모양 중 하나로 보아야 할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소식을 들은 다른 할머니는 그들의 선택에 치를 떨었다.
Photo by Steven HWG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