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현: Good-bye, 나와 엄마의 '이른 아침'
아- 여전히 내 눈을 의심하고 있다. 영원히 국립현대미술관에 있어줄 것 같았던 박래현의 '이른 아침'이 지난 달 서울옥션에서 팔렸다는 인터넷 기사를 몇 개째 보고 있다. '얼마'에 팔렸느냐가 기사 제목마다 달려있는데, 내가 원하는 정보는 '누구'에게 팔렸느냐였다. 이렇게 알려주지 않는거면, 개인 소장이 된건가 싶어서 안달이 났다. 나는 컬렉트를 하지 않는데다 특히 가치있는 예술품의 관리는 전문가가 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관계로 미술관에서의 작품 감상을 선호한다. '개인 소장' 미술품들은 소장가가 관대하게 전시에 내어주지 않는 이상 작품을 원화로 볼 수 있는 방법이 더욱 묘연하다. 물론, 최근 한국에서도 관대한 소장가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오송역에서 '다시' 만났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물론 내가 짜증을 냈고 서먹해진 상황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한 내가 먼저 오송역에 도착했고, 광주발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한 시간 동안 역 안의 카페에서 '파친코'를 읽었다. '이른 아침'을 보러가는 길에 '파친코'를 읽고 있다니.. 나에게는 참 묘한 우연 같았다.
엄마는 예의 아무일도 없었던 양, 플랫폼을 런웨이 삼아 손을 흔들며 걸어나왔다. 내가 사서 한번 인가 입었고, 엄마한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입혀봐 드렸더니 홀라당 가져가신 꽃무늬 자수가 들어간 트랜치 코트를 입고 있었다. 70세 노모의 자태는 분명 아니다.
오송역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까지는 택시로 약 40여분을 달렸다. 흔치 않는 오픈 수장고가 있는 국립미술관에 간다는 설레임, 박래현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를 보러간다는 설레임, 그리고 엄마에게 꼭 원화로 보여주고 싶었던 그림을 보러간다는 설레임으로 말 없이 택시 뒷좌석에 앉아있었다. 엄마는 또 이것저것을 물어왔다. 이럴 때, 친절한 택시 기사님을 만난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한테 짜증냈던 감정이 아직 다 풀리지 않은 상태였는데, 엄마는 엄마 감정 가는데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하지만 곧, 미술관 앞에 서자마자 그림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하게 되고, 이런 생각들과 감정들은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잊게 되었다.
'엄마, 이 그림 보려고 여기에 왔어. 책에서 봤는데 외할머니 생각이 나는거 있지.'
'이른 아침', 1956년 作
박래현 화백은 이 그림을 1956년에 '노점'과 비슷한 시기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도판으로 처음 본 '노점'의 구성과 화면분할, 특히 인물묘사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1950년대에 한국의 화가가 한국에서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보다 불과 몇 십년 전부터 서양화가 물밀듯이 들어오던 상황이었고, 당시 많은 화가들이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워와서 캔버스에 유화를 그렸지만 거기에 한국적인 무엇인가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였다. 나중에서야 박래현 화백의 일본 유학당시 작품을 보았는데, 약 20여년의 시간동안 변하지 않았던 단 한 가지 사실은 그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 뿐이다. 그 외에는 완전히 다른 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보일 정도로 그 사이 수많은 연구와 시도를 했음이 분명했다.
이렇게 여러모로 닮아 있는 '이른 아침'은 '노점'보다 내게는 감성적으로 다가왔다. 원화의 크기부터 컬러의 톤 등으로 인해 나란히 걸려 있지 않아도, 같은 화가가 그린 것이라 가늠이 되는 그림들인데, 하나는 테크닉의 (나에게는) 완벽함에, 또 다른 하나는 노스텔지어를 불러 일으키는 감성터치의 완벽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마는 '이른 아침' 앞에서 만큼은 외할머니 이야기에 울지 않았다. 그대신 내 수십년 전 기억에도 선명한 할머니의 쪽머리, 무명치마저고리, 그리고 딱 그림과 같이 머리 위에 보따리를 얹고 시집간 금쪽같은 딸을 보러 오시던 모습, 그 딸이 낳아서 세상 두쪽이 나면 당신 품에 나를 안고 털 끝하나 다치게 하지 않으시려고 억세게 애쓰시던 마음을 고스란히 함께 느꼈다.
영상통화 너머로 '이른 아침'의 소식을 전했더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할말을 찾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은 마치 내가 미국으로의 발령 소식을 '이제 나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라는 말로 다시 설명해 드렸을 때의 것과 비슷했다. 몇 시간 뒤에야 결심이 선듯 '일단 가, 가서 못하겠으면 그때 그만두고 한국 와서 글을 써.'라고 했던 참이었다. 미국에 도착하고 7개월만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소식까지 듣자, 그제서야 몽글몽글 눈물이 차오르는 눈으로 안도의 숨을 내었다. 첫번째 글을 공개하기 전 2주 동안이나 엄마와 말을 하지 않았고, 그 시간을 엄마는 또 걱정으로 가득채웠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