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쪽 가게, 집의기록상점
제주 동쪽에서 서쪽으로 놀러 가는 날.
머물던 동쪽 종달리에서 서쪽 애월까지 차로 1시간 반, 왕복으로는 3시간. 전날 밤부터 가려던 곳을 갈지 말지 고민이었다. 시간은 그리 문제 될게 아니 였지만 그 날은 무섭다는 풍랑주의보가 떨어진 날. 바람 많이 부는 제주 인건 알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맑은 날씨만 믿고 겁도 없이 서쪽으로 건너갔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 때문에 몸집이 작은 내 차는 하염없이 휘청거렸다. 나들이하는 마음으로 나왔다가 모험으로 바뀌어 버린 여정. 작은 경차 하나에 온전히 나를 맡겨야 했다. 한 번의 큰 휘청 거림에 무서워서 돌아갈까 했지만 바람만으론 나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큰일날 소리다. 다행히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는 내비게이션 언니의 말에 그제 서야 꽉 잡은 운전대를 놓았다. 다시 돌아가는 일이 벌써 까마득 하지만 일단 즐기기로 했다.
해안가를 따라 어느 포구에 다다르자 보이는 작은 벽돌집. 영화 속에서 보던 유럽의 작은 마을이 떠올랐다.
혹시나 날씨 때문에 문을 열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주인으로 보이는 하얀 앞치마를 두른 누군가가 보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가게에 들어서자 바깥공기와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됐다. 프랑스 남부 작은 시골 가게에 온 듯한 느낌. 거센 날씨 탓에 왠지 손님이 나 혼자인 것 같았지만 여유 있게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하얀 벽을 바탕으로 세월이 느껴지는 우드톤의 가구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파란 풍경이 마치 그림 같았다. 머리 위 선반 에는 라탄으로 만들어진 바구니들이. 안 쪽으로 들어갈수록 내 주방에 놓고 싶은 예쁜 그릇과 커트러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장면이다. 여행만 가면 컵과 그릇을 사는 나로서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어떤 아가들(그릇들)을 집으로 데려갈지,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한참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하다 고른 접시 하나와 버터나이프. 계산하려고 하니 주인분께서 혹시 빵은 괜찮으냐며 물으셨다. 식기류들을 보느라 미처 보지 못한 갓 구운 디저트 빵들이 카운터에 놓여있었다. 오븐에서 갓 나온 듯한 노릇노릇한 색감의 에그타르트와 피낭시에 그리고 까눌레까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이건 뭐예요? 에그 타르트와 비슷해 보이는데?”
-“아 이건, 콘 타르트예요. 저희 집에서 잘 나가는데 옥수수가 들어간 타르트예요.”
보기만 해도 입가에 침이 고였다. 다 먹어보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무리일 것 같았다.
에그와 콘 타르트 두 개만 골라 계산을 하려는데,
“혹시 제주에 사세요?”
-“아, 아뇨 여행 왔는데 지금 제주 동쪽에서 한달살이 중이에요.”
“어머 정말요? 동쪽 어디요? 동쪽에서 오기 정말 먼데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종달리에서 지내고 있어요. 안 그래도 오늘 바람이 너무 심해서 오는 데 정말 무서웠어요. 그래도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라 왔는데 정말 큰 맘먹고 와야 하는 것 같아요. 하하.”
“우와, 신기하네요. 저 종달리 알아요. 저도 예전에 동쪽에서 한달살이 했었거든요. 거기서 오셨다니 너무 반갑네요. 동쪽에서 먼길 오신 게 왠지 남일 같지 않네요. 지금 혼자 지내고 계세요? 제가 피낭시에랑 까눌레도 챙겨드릴게요. 친구분들과 나눠 드세요.”
사장님의 따듯한 친절에 녹아버린 나는 바람을 뚫고 먼길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조금은 위험한 여정 이기는 했지만, 오늘 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하루.
나도 누군가에게 따듯한 하루가 돼주고 싶던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