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1회 셀프청탁 에세이
이럴 수가. 내가 다니던 헬스장이 폐업했다.
기운이라는 건 이렇게도 정확한 것인지, 왠지 한 달 전부터 쎄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어떤 날은 금요일이라서, 또 어떤 날은 비가 와서 사람들이 적은 거라고 넘겼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헬스장이 휑하던 날들이 너무 잦았다.
자주 가는 카페에 사람이 적으면 조용하고 집중이 잘 되어서 '나'는 좋지만, 정반대로 불안감도 피어난다.
이런 영리 시설이 계속 운영이 되려면 일정한 수입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누가 봐도 장사가 잘 안 되는 게 뻔할 때, 단골 입장에선 심경이 복잡 미묘한 것이다.
카페 하나가 사라져도 싱숭생숭한데, 헬스장이 사라지다니.
하루아침에 직장이 사라진 20대 PT쌤을 위로해 주며 '인생 그럴 때도 있어'라고 토닥이지만 실은 나도 어이가 없다.
천안으로 시집 온 이후 '헬스장 가기'는 내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루틴이 사라지다니, 때아닌 이별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정서적인 허망함뿐만이 아니다. 거기다 돈 문제가 얽혀있다.
신랑과 나는 주 2회 PT를 받고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으로 받으려고 50회나 끊었다가 낭패를 보게 된 것이다. 일단, 신용카드 영수증과 계약서 사본을 우체국을 통해 내용증명 보내는 것 말고는 환불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헬스장 사장은 저번에 나랑 같이 담배 피우지 않았냐고 알은체를 하며, 3개월을 기다려달라고 무지 당당한 태도로 대응했다.
신랑 왈,
"아니 대체 누구랑 헷갈리는 거냐고.
매일 걸치고 다니는 금목걸이나 팔지."
사장이 초기 세팅에 나름 공은 들였겠지만, 운영하는 동안 제대로 된 회원관리 없이 쭉 나 몰라라 해왔던 것은 PT쌤들과 회원들이 뻔히 다 알고 있다.
그 사장은, 마치 주식 사놓고 배당금 나올 때가 되어서야 '아 나 주주였구나'하면서 계산기만 두드리는 주인이었다.
손님 같은 주인이라니. 망할 만도 했다.
그는 헬스장에 '정'을 붙이지 못했고 사업 철학이나 고객관리에 대한 전략도 없었다.
연간 등록비와 PT 회당 금액에 대해 마지노선을 정해놓는 것 외에는 일체 '아끼는 데에만 주력'해왔다.
청소까지 해야 하는 PT쌤들의 불만은 조금씩 쌓였고, 창업 당시부터 이바지했던 몇 분들은 손절을 외치며 이탈하기도 했다.
그렇게 헬스장 구석에 먼지가 쌓였고, 회원들은 금세 그 먼지를 알아차렸다.
사장만 그 먼지를 못 봤다.
바보다 바보.
새 기구만 들여놓는다고 헬스장이 아니다.
공간을 채우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열의'와 '성의'다.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본다.
나는 지방의 아주 작은 동네에서 중고딩 시절을 보냈었는데, 그때 유일하게 다니던 학원이 동네에 있는 수학학원이었다. 그 작은 학원은 나처럼 오래된 충성고객들 외에는 새로운 고객을 유치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 주변에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것도 아니고, 국영수 종합학원보다는 단과학원 보낼 수 있는 정도의 지역 소득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원은 겨우겨우 연명하다가 갑자기 확장이전했다.
코딱지만 했던 학원이 갑자기 커지고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기 시작했다. 나는 '쌤'에서 '원장님'이 된 용문쌤의 들뜬 에너지에 꽤 오랫동안 전이됐던 것 같다.
새로운 얼굴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용문쌤이 다른 학원을 인수했는데, 피인수학원의 학생들이 더 많아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배수진을 치고 과감히 '투자'를 한 것이고 그렇게 마지막 승부를 본 것이다.
본인은 가르치는 능력이 매우 훌륭하지만, 기반이 약하다는 냉정한 판단을 한 것 아닐까.
그래서 원생이 더 많은 학원을 인수하였고, 본인이 직접 그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면서 점차 그 효과를 본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인수학원을 다녔기에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피인수학원의 학생들에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불. 성적 오르지 않으면 환불.' 이런 조건을 내걸지 않았을까.
다행히 용문쌤의 투자는 성공적이었고, 학생들은 50평 강의실 하나도 모자랄 만큼 항상 꽉꽉 들어찼다.
학원을 빛낸 졸업생들이 많아질수록
용문쌤의 빚은 점차 줄어들어갔을 것이다.
17년 전, 제약회사 영업팀 다니던 친구가 병원 갑질을 얘기하며, 내게 한마디 했었다.
야, 영업 안 해보고
인생 안다고 얘기하지 마.
니가 영업을 아냐?
당시 회계법인에 갓 들어갔던 수습회계사였던 나는 친구말을 듣고 '난 영업 할 필요 없는데?'라며 콧방귀를 뀌었었다.
그러다 얼마 안 지나 나도 곧 '지독한 영업의 세계'에 진입하고 말았다.
회계사에게 영업이란 결국 제안서를 죽어라 쓰는 것이다.
회계법인 다니면서 가장 하기 싫은 일 중에 하나가 '제안서 작성'이 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객이 제 발로 척척 나에게 찾아와 주면 참 고맙다.
그런 호시절도 있다. 욕심만 안 부리면, 수의계약만 해도 먹고살만한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은 모든 것이 경쟁이다.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제안서를 작성해야 한다.
헬스장에서 전단지를 뿌리는 것처럼,
용문쌤이 학원을 인수하는 데 공들인 문서처럼,
나도 제안서를 쓰고 있다.
내 팔자에도 영업은 있었다.
영업 없는 팔자가 있을까.
사람의 지갑을 열게 하는 것,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게 정말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나도 이번 제안서에
적어도 폐업한 그 헬스장 사장보다는
더 큰 열의와 성의를 보여봐야겠다.
주인이 된마냥 혼연일체가 되어 작성하면,
힘들겠지만 그렇게 하얗게 불태워보면
결과에 실망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