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김부장님, 오늘은 김프로
최근 심심치 않게 직급과 호칭에 대한 전통 기업들의 다양한 시도가 눈에 띈다. 지난주에는 중후장대 산업에서도 직급 축소 바람이 불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변해가는 사회에 맞춰 변하기 위한 조직의 노력은 참 좋은 시도로 보인다. 아래 기사를 살펴보자.
기사: 스무살 차이나는데 같은 '매니저'... 중후장대 산업에 부는 직위/직급 파괴 바람 (조선일보, 2020.12.26)
좋은 시도들이 많이 있지만 가끔 이러한 트렌드가 조직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단순히 직급이나 직위만이 우리의 직장 생활과 문화를 힘들게 만들진 않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느껴 왔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기사에 나온 것 처럼 수평적인 조직문화 조성을 위해 눈에 보이는 직급/직위 축소 등과 같은 변화와 함께 언어, 일하는 방식, 평가와 보상 3가지의 변화가 함께 고려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이야말로 정말 우리의 직장 생활을 힘들게 만들었던 요소가 아닐까?
1. 언어 - 암묵적 위계 형성
한국 사회는 유독 나이에 따른 서열을 강조하고 직장에서도 알게 모르게 친분이 있는 경우 형/동생/언니/오빠 가 되는 경우가 많다. 사적인 자리까지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언어에 따라 생성되는 암묵적 서열은 직장에서의 관계에도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 만약 직위나 직급의 축소와 더불어 사용하는 언어의 형식을 바꾼다면 좀 더 효과적으로 수평적인 문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어떤 회사가 '매니저' 라는 호칭으로 직급을 통일하기로 한 상황에서 과거 부장직급이었던 박매니저가 대리였던 김매니저에게 보고서를 독촉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1) "야 김매니저야, 너 언제까지 그 보고서 붙잡고 있을거야? 얼른 해서 내 책상에 올려놔!"
(2) "김매니저님, 그 보고서는 언제까지 작업이 필요한건가요? 가급적 빨리 해서 저에게 전달해 주세요!"
(1)의 경우는 누가봐도 직급이 있는 것과 다를바 없는 상황인데 기존 조직의 직급-사람 매칭이 익숙하다면 모를까 신입이나 경력으로 새로 입사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혼란스럽기만 할 수도 있다. 이 회사는 이럴거면 그냥 직급을 유지하고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게 만들지 뭐하러 다른 회사 흉내를 내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물론 (2)의 경우는 이상적인 묘사에 가깝고 조직내 끈끈한(=끈적한?) 정이 사라지는 부정적인 영향도 있겠으나 한국사람이 한글을 사용하는 이상 수평적인 조직 문화와 정감있는 조직문화를 함께 가져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해볼 법한 일이 아닐까 싶다. (정감있는 조직문화를 포기 못하겠다면 반말은 어떨까?)
스타트업에 근무할 때 격의 없이 지내고 싶어 형/동생 처럼 지낸 동료들이 많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의사결정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위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는 점만 깨달았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현 직장으로 오면서 직급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고 특히 가까운 직원에게는 더 신경을 쓰고 있는데, 다소 거리감은 있지만 언어적인 부분에 의한 위계 형성은 확실히 줄어든 것 같다. (물론 지금 회사는 직급이 깡패라 큰 의미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
2. 일하는 방식 - Rank Driven vs. Role Driven
회사의 '직책'은 보통 관리자 직급이 특정 조직장 역할을 수행할 때 이를 명시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사용한다(본부장, 팀장, 파트장 등). 일반적으로 직책은 상위직급 시니어들이 부여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다 보니 대부분의 주니어급 직원들은 직책을 가진 보직자들이 시키는 일을 할당받아 수동적으로 수행 하는데 익숙한 경우가 많다.
조직의 직급을 줄이고 수평적으로 만들더라도 위와 같이 위계에 기반한 직책 설정을 하게 된다면 큰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의도대로 제도 변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연공서열, 직급과 같은 위계 대신 역할과 직무 중심으로 권한과 책임이 설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시니어는 좀 더 종합적인 뷰를 가지고 정말 신경을 써야 하는 영역에 집중할 수 있고, 주니어는 본인의 업무를 주도적으로 수행하며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전자현미경급 마이크로매니징을 하는 관리자와 미꾸라지처럼 책임회피하는데 도가 튼 실무자들이 넘쳐나는 한국의 기성조직에서 이런 방식으로 전환이 잘 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실제로 필자는 과장급 직원이 대리급 직원에게 "이제 너도 나도 같은 매니저인데 이런 일은 앞으로 나한테 물어보지말고 알아서 하자"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설마 그정도까지 할라고 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럼 매일 마주치는 옆자리의 동료, 상사, 타 부서 사람들을 눈을 감고 생각해 보라. 더 심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확실하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아주 건강한 조직문화를 가진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 열심히 회사생활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3. 평가와 보상 - 내재적 동기부여의 중요성
직급도 줄이고 언어와 일하는 방식도 변화 시키고 이를 뒷받침할 여러 협의체와 제도들도 만들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업무와 성과 중심의 수평적인 문화를 가진 회사로 탈바꿈할 것 같다는 기대가 들겠지만, 평가와 보상 시스템을 잘 설계하지 않는다면 이전보다 더 심한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맞닥드릴지도 모른다.
필자는 HR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 적절하다 라고 의견을 제시하긴 어렵지만, 그간의 경험에 비춰보자면 개인 평가 설계에 앞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요소들에 대한 고민이 꼭 필요해 보인다.
회사의 장기적 방향과 목표 설정 및 공유
중간관리자의 인사 관점 자질 향상 및 훈련
조직별 특성과 회사 전략을 고려한 평가지표 설정
적절한 프리라이더 규모 유지
이러한 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평적 조직문화는 구성원 각자에게 더 많은 부분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특히 직급 축소 등으로 외재적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보상 수단에 제약이 생긴다면 개인의 커리어, 일의 의미와 같은 내재적 동기부여를 강화하고 잘 유지하는 면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다소 장황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변화관리를 잘 하자로 귀결 될 수 있다. 변화를 통해 젊은 직원들이 더 만족하며 회사를 다니고, 조직이 더 생산성 있게 일하며, 구성원들이 더 성장할 거라고 경영진들은 생각하겠지만 보통 사람과 관련한 변화는 그 변화의 시작보다 그 변화의 관리가 원하는 결과의 성패에 영향을 많이 주게 마련이다. (사람은 변하는 존재이지만 조직속의 사람은 변하기 어렵다.)
추가로 그 변화에 적합한 사람을 채용함으로써 조직에 적절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변화의 속도를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에 변화관리 못지 않게 채용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많은 기성조직에서 여전히 채용에 있어 인사조직의 권한과 영향력이 필드에 있는 조직보다 크게끔 인사제도가 설계되어 있어 자율적인 변화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건 아쉬운 점이다.
중후장대 산업과 대기업도 점점 바뀌어 가고 보수적인 금융권에서도 수평적인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노력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조직이 어떤 구조로 어떤 리스크를 감수하며 돈을 버는지, 다시 말해 비즈니스 모델이 무엇인지가 조직문화의 태생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 조직도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보는건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경험이고 정체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