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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MNI Aug 07. 2020

누굴 위한 공인인증서인가


실용적이지 못한 것이 매우 싫다. 예를 들면 금융권 업무. 휴대폰 본인 확인과 공인인증서를 연달아 인증하고 나면 힘이 빠진다. 일 년에 한두 번 할까 말까 한 업무를 위해 노트북에 불필요한 인증 프로그램을 잔뜩 깔 때면 머리끝까지 화가 나기도 한다. 이렇게 철저한데도 여전히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에 당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떠올릴 때면 누구를 위한 철저함인가 의문이 든다. 속이기 위한 자와 속지 않도록 돕겠다는 핑계로 모든 귀찮음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자의 대결 같달까?


며칠 전 신용카드를 하나 발급받았다. 도시가스와 전기세를 납부하기 위함이다. 지난 몇 년간 손쓸 수 없이 헤퍼진 씀씀이를 줄여보겠다며 신용카드를 전부 없앴던 작년 겨울의 다짐이 무색해지는 듯했지만, 단 몇 푼이라도 아껴보겠다는 세대주의 일념이 담긴 선택이다.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남겨둔 비상용 신용카드는 아무런 혜택이 없는, 연회비 5천 원짜리에 불과하니까.


백수임에도 신용카드는 탈없이 발급됐다. 주거래은행이라 그런 걸까, 아직 내가 백수인 걸 모르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시가스 어플에 접속했다. 자동납부 변경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지 후 재신청을 해야 하는 것과 새 신용카드의 번호 자릿수가 10자리에 불과해 여러 번 카드 번호를 살펴본 것을 제외하면. 짜증은 한국전력부터 이어졌다.


우선 사이트에 로그인해야 했다. 내가 사용하는 아이디는 대개 학창 시절 전후로 나뉜다. 스스로 전기세를 납부하기 시작한 건 지난 겨울부터다. 난 등록했을 법한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틀렸다. 재빨리 패스워드에 특수문자 몇 개를 덧붙였다. 영어와 숫자의 조합을 넘어서 영문 대소문자와 특수기호 여부까지, 사이트마다 제각기 다른 패스워드 기준 때문에 매번 이런 식이다. 이거 아니면 저거, 저거 아니면 요거, 요것도 아니면 마우스 커서는 결국 비밀번호 찾기 버튼을 향한다.


카드사를 선택하고 신용카드 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했다. 늘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약관을 동의하고 신청 버튼을 눌렀다. 하, 공인인증서 인증을 위한 프로그램을 설치하란다.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사이 공인인증서가 든 USB를 꺼내왔다. 설치를 완료하고 보니 내가 입력한 정보가 전부 사라졌다. 다시 카드번호를 입력하고 이동식 디스크를 눌러 인증서를 선택해 암호를 입력했다. USB에 담긴 공인인증서는 총 3개다. 개인용, 사업자용, 그리고 주식용. 전부 내 이름이 적혀있는 터라 3개의 인증서 중에 어떤 것을 사용할지 선택해야 한다. 전기세까지 끝났다!


포털사이트에 새 신용카드를 검색했다. 휴대폰 요금 납부 방법도 변경할까 싶어 혜택을 살펴봤다. 10%를 할인해준다는 문구를 발견하고 통신사 사이트에 접속했다. 회사에 다닐 때, 회사 컴퓨터로 자동납부 방법을 변경하려다 공인인증서가 없어 여러 번 좌절했던 기억이 있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이왕 공인인증서를 꺼내왔으니 오늘 바꿔야겠다.


통신사 아이디와 패스워드는 이제 눈감고도 칠 수 있다. 그만큼 여러 번 틀렸었다는 뜻이다. 10번도 더 틀렸던 기억이 있다. 공인인증서 프로그램을 실행하려면 핸드폰 본인 확인을 거쳐야만 한다. 심지어 이곳의 공인인증서 프로그램은 아까 한국전력 사이트에서 설치한 것과 다르다. 네이버 웨일 브라우저를 사용하고 있어 확장 프로그램도 새로 설치해야 한단다. 이야, 여긴 더 답이 없구나!


본인 아이디로 로그인해 본인 명의의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하고 본인 명의의 휴대폰으로 SMS 인증을 해야만 비로소 공인인증서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금고 속에 금고 속에 금고 속에 금고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철저한 루트를 거친 후에 하는 업무는 고작 요금 납부 방법을 변경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신용카드로 지불하게 해달라며 손발이 닳도록 비는 느낌은 짜릿하다. 누굴 위한 암호화 시스템인지 궁금할 지경이다. 정말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함일까? 혹은 기업의 책임을 면피하고자 함은 아닐까?


올해 말 공인인증제도가 사라진다. 21년 만이다. 생체 인식과 휴대폰 인증이 공인인증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예정이다. 사설 인증서를 어떻게 믿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그건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다. 공인인증서를 사용한다고 해서 내 정보가 유출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소비자 정보를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가 있음에도, 고객 데이터 관리가 부실해 허구한 날 내 정보가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상황에서 말이다.


'공인'이라는 명칭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설치하게 하며 내게 책임을 떠넘기려면, 적어도 소비자의 번거로움을 줄이려는 노력이라도 했어야지. 간단한 업무 두 건을 위해 설치한 프로그램만 세 개다. 일 년에 몇 번 이용하지 않을 프로그램이 내 노트북 용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불쾌하다.


일전에 인터넷 서핑 중 읽은 문구가 떠오른다. 공인인증서랑 액티브X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화장실 갈 때마다 액티브X를 깔고 들어가라고. 변기에 앉기 전에 공인인증서 인증 실패해서 바지에 지리라고. 오늘 나도 바랐다. 바지에 지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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