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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소리 Jun 21. 2023

갓생을 산다는 것의 의미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며 (2)

요즘 유행어처럼 쓰는 말로 부지런하고 모범적인 생활을 "갓(God)+생(生)"이라고 부른단다. 30대가 되니 이런 유행어를 좇는 게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 말을 처음 듣고 갓생의 정점을 산 인물들이 위인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그 위인전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순신, 알렉산더 대왕, 헬렌 켈러 같은 유명(?) 위인전기뿐만 아니라 유리 가가린, 도쿠가와 이에야스, 김대건 신부 같은 비주류적 위인전기까지 빠짐없이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곤 이 위인들처럼 갓생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중고등학생 때부턴가 이런 꿈이 아주 허무맹랑하다는 걸 깨달은 동시에, 그런 꿈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개인적 행복을 포기하고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어렴풋이 느꼈다.



다들 학교 내신, 혹은 수능을 준비하며 모두들 인내하고, 견디고,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는 경험을 했을 것이고, 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중도에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거나 포기를 했을 것이다. 마치 체력 검정을 위한 오래 달리기를 하면서 여기서 조금 쉴지, 넘어가는 숨을 부여잡으며 속도를 유지할지 고민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어릴 적 읽었던 위인전 속 위인들처럼 되려면 죽을 때까지 매 순간 중도에 쉬는 선택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여기서 포기하고 멈출 건가?'라는 질문이 늘 머릿속에 맴돌았고, 목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위태롭게 뛰듯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


다행인 사실은 이 노오력이란 걸 끊임없이 하다 보면 그로 인한 괴로움의 역치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중고등학생 땐 공부가 죽도록 하기 싫었지만, 대학생 땐 학기가 시작할 때부터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준비해도 정신적으로 크게 힘들지 않게 되었고, 대학원생 땐 특별히 다른 일을 하지 않을 때의 디폴트가 공부,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활도 이십여 년 하다 보니 남들이 평균적으로 1의 노력을 할 것 같으면 5-10의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내 감정의 영향을 최대한 줄이고 마치 기계처럼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해 스스로를 트레이닝했다. 결과적으로 몇 시간씩 노오력을 해도 별다른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다.


또 다른 재밌는 점은 이렇게 살며 내가 속하게 되는 그룹들은 모두 비슷한 사람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특목고, 명문대, 미국 박사과정 모두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집합이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달리는 데에 익숙하고, 필요하다면 남들보다 더 쌔게 채찍질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이런 환경은 분명 나 자신에게 더 채찍질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마라톤에서 러닝메이트들과 같이 달리는 것과 흡사했다. 아주 지옥 같은 환경일 것 같지만, 다들 정신적 인내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 특별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사이가 나쁘거나 하지도 않았다. 어렴풋이 이런 환경에서 평생을 산 연구자들이 역사에 남는 연구들을 남기고 때때로 노벨상, 필즈상을 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간간히 '평생 이렇게 참고 버티며 살 거야?'라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언제까지 내 개인의 행복, 여유, 즐거움을 유예하며 살 것인가. 박사과정 시절 알게 된, 갓생의 정점을 살아온 한 교수님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어렴풋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 미국 탑스쿨 박사과정에서 미국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학위를 받았으며, 내가 공부하던 학교에서 조교수를 시작한 분이었다. 탑저널에 논문을 꾸준히 싣는 이 분야에서 가장 촉망받는 한국인 학자이기도 했다. 저명한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 토론토대 교수는 세계적 성과를 내는 사람들의 일상을 직접 관찰해 보면 이들이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열심히 산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겐 이 교수님이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주말을 포함해서 어느 대학원생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오로지 연구에만 매진을 하시는 걸 보며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나 싶었다.


교수님께서 한국인 박사과정생들을 초대하여 밥을 사주신 때였다. 충격적이게도 교수님께선 몇 시간 동안 미국 학계가 얼마나 살아남기 힘든지, 자신의 생활이 얼마나 고되고 괴로운지 하소연하셨다. 개인적 일상생활이 전혀 없이 하루 12시간이 넘는 연구활동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식사는 대부분 인스턴트식품으로 때우다 보니 건강도 무너졌다고 하셨다. 그러나 미국 명문대에서 테뉴어(종신고용)를 받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정신적 고통 없이 철인 같은 생활을 하고 계신 줄로만 알았는데 그분 또한 참고 버티는 삶을 살고 계신 거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결코 고고하지만 끊임없이 발버둥 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 그 삶에 장대한 대의와 명예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후 목표를 좀 내려놓게 되었다. 여유를 가지고 대학원 생활을 하다 보니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건강해졌고 꽤 행복하게 박사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 교수님은 안타깝게도 몇 년 전 테뉴어를 받지 못하고 한국의 대학으로 옮기신 후였다.


이제는 갓생을 사는 게 뭐가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다. 물론 평생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남들이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루고 사회적 후생 증진에 기여한 사람들에게는 박수를 쳐줘야 한다. 지금 에어컨 바람을 쐬며 한량처럼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윌리스 캐리어라는 발명가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에어컨을 개발했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개인의 관점에서 행복을 추구할 때 갓생을 살고, 말고는 큰 의미가 없다. 물론 노력을 통해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업을 얻으면 중장년이 되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좀 더 만족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을 위해 포기했을 또 다른 즐거움들, 예컨대 중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PC방에서 밤을 새우며 느꼈을 희열과 비교했을 때 뭐가 더 나을지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그리고 우린 이미 각자에 맞는 행복에 최적화된 선택들을 내리며 살아왔다. 갓생이 필요한 사람들만 갓생을 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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