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분야에는 프로들이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가 존재한다. 영화나 문학에서는 작품성, 음악에서는 음악성, 학문에서는 학문성 등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우린 때때로 이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대중성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분야의 프로들, 혹은 프로 지망생들은 많은 경우에 대중성을 배척해야 할 가치로 여기기도 한다. 나도 석사과정 시절, 박사과정은 마치 도를 닦듯이 학문에 몸을 바칠 사람들만 가야 한다는, 다소 편협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박사과정을 마친 지금 이 생각이 옳았던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해보려고 한다.
한국사회가 점점 더 흉흉해지는 건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민을 위해 유학을 가고 싶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적잖이 있다. 영어가 네이티브가 아닌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미국으로 바로 이민을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말하자면 징검다리로 학위를 따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여기다 학부 유학은 너무 늦었고, 1-2억의 석사 유학 비용은 너무 크기 때문에 학비도 무료이고 적당한 월급도 나오는 박사과정은 그리 큰 리스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을 구하기 어렵지 않다는 장점도 있다.
예전 같으면, 아니 1년 전만 하더라도 인생을 말아먹을 생각이냐고 도시락 싸들고 말렸을지 모른다. 연구에 큰 뜻이 없는 경우에 박사학위 논문을 쓴다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수차례 봤고, 연구에 큰 뜻이 있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논문을 쓰지 못한 경우에 7-8년 동안 학위를 받지 못하고 결국 중도포기하는 경우도 왕왕 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적당히 하는 경우 졸업하지 못할 리스크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또 그 또한 하나의 삶의 방법일 수 있고, 요령껏 머리를 쓰면 꽤 무난하게 박사과정을 졸업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실제로 인도와 중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물밀듯이 미국으로 건너와 박사학위를 받은 후 IT기업은 물론, 제조업, 금융업, 국가기관, 국제기구에서 직장을 잡고, 자국의 대졸자 직장인들에 비해 10배, 50배의 연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정착해 왔다. 구글, 마소, 아마존, 엔비디아 등의 엔지니어들은 물론, 수많은 경영진이 아시아계 석박사들이란 사실은 이제 너무 유명하다.
나와 같은 해 박사과정에 입학했던 클린트는 지난 5년 간 박사과정이 미국 이민의 좋은 수단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동유럽의 북한이라 불리는 알바니아에서 온 클린트는 다른 동기들과 달리 석사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첫 2년 동안 코스웍을 따라가느라 말 그대로 개고생을 했다. 클린트는 11명의 동기 중 3명이 탈락했던 퀄리피케이션(박사과정 중간심사)은 가까스로 통과했지만, 여러 사람들은 여전히 그가 3년 차 즈음 박사과정을 중도포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럼에도 그 친구는 자신만의 속도와 방법으로 조기의 목표를 위해 한 발씩 나아가고 있었다. 나중에 절친이 된 이후, 클린트는 자신의 목표가 대단한 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정착하여 고연봉을 받으며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클린트는 이론적, 수학적 백그라운드가 부족했기에 꼼꼼하고 자세한 분석이 필요한 데이터웍과 실증분석에 집중했고,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 능력(알바니아어는 영어와 언어적 거리가 꽤 멀다)과 유려한 발표 능력을 통해 4-5년 차 연구 발표에서 늘 교수님들께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다른 동료 및 교수들과 코웍을 통해 졸업에 필요한 세 편의 논문을 5년 안에 무리 없이 준비했으며, 3년 차부터 일치감치 이민 절차를 준비해서 4년 차에 이미 영주권을 취득했다. 지난 5월 나와 같은 시기에 졸업한 클린트는 30만 달러 이상의 높은 연봉에 한 유명 컨설팅펌과 계약하여 시애틀에서 일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역시 석사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보다 1년 먼저 입학했던 청디도 졸업 후 약 28만 달러의 초봉으로 한 메이저 컨설팅펌과 계약을 맺고 보스턴에 정착했다.이들은 박사과정 동안 별다른 두각을 보이지 않았지만 27-28살의 어린 나이에 보란 듯이 좋은 조건으로 미국 사회에 정착했다. 이렇듯 컴퓨터공학을 비롯한 이공계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인더스트리에서 좋은 오퍼를 받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올해 인근 학과인 정치공학과(Political Science)의 몇몇 중국인 졸업생들도 메타플랫폼의 리서치센터인 메타리서치에서 오퍼를 받았다. 물론 학계 연구자를 키워내려는 대학들이 이러한 박사과정생들을 항상 반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더스트리에 좀 더 친화적인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박사과정 프로그램은 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러나 지난 5년간 미국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기업들이 다방면의 연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인더스트리의 연구자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의 연구와 맥락이 좀 다르지만, 기업들의 연구도 사회적으로 가치가 적지 않다. 몇몇 교수님들은 연구의 헤게모니가 서서히 대학에서 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5년 전과 달리, 학계에 큰 뜻이 없더라도 이민, 취업 등의 목적에서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유망한 방향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미국의 박사과정이 (대학 랭킹과 무관하게) 대체로 만만치 않으며 중도포기율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