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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소리 Jun 01. 2023

불확실성의 창출

불확실성은 삶을 생기롭게 한다

올여름 싱가포르로 부임하기 전 한국에 들어와 자주 하는 일이 있다. 주변 지인들의 고민 들어주기이다. 아마도 아주 보편적이지는 않은 인생을 산 내게 뭔가 틀에 박히지 않은 답을 바라는 듯했다. 경의선 숲길 옆 한 카페에 앉아 얘기를 나누며 15년 지기 고등학교 후배가 하소연했다. 


"선배, 난 이제 별다른 가능성이 안 보이는 것 같아." 


어느덧 직장생활 5년 차인 후배는 사무실 차장, 부장님을 보며 자신의 미래도 큰 성취 없는 그 직장 선배들과 다르지 않을 거란 사실에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 안정과 모험 사이, 다른 말로 권태와 불안 사이라고 말했다. 이런 고민을 벌써 여러 사람에게 들은 걸 보면, 안정을 택한 이들이 직장생활 5년 차 즈음 지나면 권태로움을 느끼는 것이 보편적인 모양이었다.


줄곧 모험을 택하며 수없이 불안감에 시달려온 나로서는 이들의 고민이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긴 했지만, 같이 답을 고민해 보기 위해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는 유명해진 얘기지만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이 교육업계에 뛰어든 것은 우연한 계기 때문이었다. 서울대 재학시절 일찍 결혼한 손 회장은 생활비가 다 떨어졌다는 아내에 말에 어떻게 하면 단기간에 돈을 벌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곧 서울대 졸업식이 열린다는 소식에 그는 동생과 친구들을 모으고, 지인들로부터 보온병을 모아서 졸업식 참석자들에 커피를 팔았다. 한겨울 야외에서 열렸던 터라 커피는 순식간에 동이 났고 생활비를 훌쩍 뛰어넘는 돈을 벌었다. 졸업식에서 그를 알아본 몇몇 지인들은 서울대생이 왜 노상 장사나 하고 있냐고 힐난하기도 했다. 놀라운 점은 졸업식에서 장사를 하는 걸 목격한 지인들 중 하나가 사정을 딱하게 여겨 과외 학생들을 연결시켜 주었고, 그것이 교육업자로서 커리어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과외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이후 거대 온라인 교육업체를 키운 것은 교육자로서, 기업가로서 그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지만, 이 우연한 기회가 아니었더라면 교육계에 전혀 뜻이 없던 손주은 회장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을지 모른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기회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창피함을 무릅쓰고 가용한 도구들을 끌어모아 뛰쳐나가는 추진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때때로 성공한 누군가를 보며 순전히 운 때문이었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완전히 잘못된 가치관이다. 왜냐하면 운도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기회란 불확실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방구석에 누워 넷플릭스만 보고 있다면 어떤 기회가 찾아올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창출하는 태도를 하이데거가 말한 기투(企投), 즉 미래에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삶의 방식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군대에 복무할 당시 이처럼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겁도 없었던 철부지였기에 내가 연구하고 싶은 분야에서 한국인 중 가장 대가인 한 교수님께 유학을 가고 싶고 이러이러한 연구를 하고 싶다고 무작정 메일을 보냈다. 상황이 불쌍해 보여서인지 그 교수님께서는 몇 가지 논문을 소개해주셨고, 나는 또 해당 논문들을 읽고 질문과 비평을 써서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1여 년 간 메일을 주고받게 되었고, 노력이 가상했는지 교수님께서는 제대 후 지도학생으로 들어오라고 권유해 주셨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은인인 석사 지도교수님과의 첫 인연이었고, 이후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교수님께서 박사를 하셨던 모교에서 박사과정 유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박사과정 중에도 교수님과의 인연이 다른 연구자들과의 인연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돌이켜 보면 군대에서 보낸 그 메일 한 통으로 내 인생의 경로가 송두리째 바뀐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인생의 경로가 생성되는 보편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한 계기가 만들어내는 나비효과. 그러나 우연한 기회는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여기서 가만히 있는다는 말은 정신적으로 비활성화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무기력하게 직장과 집만 오가며 주어진 일만 처리하고 있다면 바로 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무수한 불확실성과 기회를 애써 차단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우연한 기회를 동반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적극적으로 창출해야 한다. 직장에서 새로운 기획을 건의하거나, 부서를 이동하거나, 이직을 하거나, 부업을 하거나, 창업을 하거나, 새로운 단체에서 사람들을 만나거나 이 모든 활동은 필연적으로 불확실성과 기회를 내포한다.



물론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 부담이 된다. 경제학에 위험회피성향(Risk Aversion Rate)이라는 용어가 있다. 쉽게 말해, 불확실성을 얼마나 기피하는지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위험회피성향이 높은 사람이라면 50%의 확률로 100만 원을 받고 50%의 확률로 아무것도 받지 않는 선택지보다는 100%의 확률로 30만 원을 받는 선택지를 고를 것이다. 내 후배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위험회피성향이 비교적 높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위험회피성향이 극단적으로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매일매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일상을 살며 행복감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새로움과 기대는 행복의 본질적인 요소들이며, 불확실성이 존재하지 않는 한 새로움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정감만을 추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새로움과 기대의 발현을 막는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집과 직장만 오가며 공허함을 느끼던 잡지사 직원 월터는 우연한 계기로 한 사진작가를 찾기 위해 세계 곳곳을 돌면서 비로소 본질적인 행복을 느끼게 된다. 지금 인생 노잼 시기를 겪고 있다면 다니지 않던 길로 가보고, 만나지 않던 사람을 만나보고, 새로운 기획을 해보고 뭐든 새로운 불확실성을 만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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