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게
말에는 무게가 있다. 듣는 사람이 말의 의미를 얼마나 중요하게 받아드리는지에 정도가 있다는 의미이다. 조금은 씁쓸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같은 말을 하더라도 화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말의 무게가 다른 것이 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학부시절 존경하는 한 교수님께서는 말과 글이 힘을 담고 있지 않으면 큰일을 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석사과정에 이제막 입학했을 무렵 그 현실을 명확하게 깨달은 적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매주 수요일 외부 교수님들이나 박사님들을 초정하는 수요세미나가 있었다. 한번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에서 일하시는 젊은 박사님이 세미나에 초정된 적이 있었다. 평소 관심이 많던 실업수당에 관한 연구라 관련 논문들도 좀 읽어보았고, 발표하시는 박사님의 논문도 이미 읽어본 상황이었다. 세미나는 보통 교수님들이 질문을 많이 하시고 학생들은 청강을 하는 분위기인데, 그날따라 하고싶은 질문이 많았기 때문에 참지 못하고 세미나 도중 손을 들고 박사님께 질문을 했다. 내 질문을 들은 박사님께서 정말 중요한 질문이라고 말씀하시며 답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한 교수님께서 약간은 비아냥대는 말투로 "아무 질문이나 다 중요한 질문이래"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불그레짐을 느꼈다. 감사하게도 박사님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라 그런건데요"라고 답을 하고 발표를 이어나가셨다.
지금은 그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고, 사실 어떤 질문이었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만약 다른 어떤 교수님이 굉장히 말도 안되는 질문을 했더라고 하더라도 그 교수님은 그와 같이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일은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평범한 경험이다. 그리고 이런 부당함에 기분 나빠한다고 뭐 하나 바뀔리 만무했다. 일단 내 말이 존중받을 수 있는 위치까지 가능한 빨리 올라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내가 무언갈 바꾸고 싶어도 그 후에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박사과정은 내 목소리에 힘을 싣는 과정이었다. 이것은 남의 말을 따라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2년차까지 이어지는 코스웍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논문들을 읽고, 논문들의 함의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부는 내가 어떤 주장을 할 때에 그 근거로서 활용되는 것이다. 예컨대 세미나에서 발표자의 분석에 반박을 한다고 치면, "이러이런 페이퍼에 따르면 그런 식의 분석은 ~할 위험이 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신기한 점은 이것이 로마나 조선 등 역사 속에서 관리나 학자들이 주장을 펼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조선시대 신하들이 왕 앞에서 정책을 간언할 때에는 대체로 사서삼경과 같은 고전의 구절들을 인용하며 주장을 폈다.
이러한 과정이 몇년 지속된 이후 4-5년차가 되니 내 목소리에는 어느 정도의 힘이 실렸다. 연차가 좀 쌓이고 교수님들과 공동연구에 대해 논의를 할 때 무언가 제언을 했으면 교수님들이 저년차일 때보다 의견을 부쩍 더 수용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세미나나 컨퍼런스에 참석을 할 때에도 과거와 달리 내 의견과 주장이 존중받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연구자들이 내 발표를 듣고 의견을 적극적으로 물어봤으며 내 연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가감없이 코멘트를 남겨주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대학원 트레이닝을 받으며 수많은 논문들을 읽고 수많은 질문과 토론들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배경지식이 쌓이고 논리가 강건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친 것에 대한 주변의 리스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중이 학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많은 교수님들과 국책연구소 연구원분들이 다양한 매스컴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으니 말이다. 말과 글이 무게를 갖고 존중받는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면서 동시에 책임감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길거리 1인 시위, 국민신문고만 봐도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적잖음을 알 수 있고, 이런 이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낸다면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만으로도 박사과정을 견딘 것이 내게 충분한 리턴을 제공해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