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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소리 Jun 12. 2023

인생의 연속성에 관하여

박사과정 유학을 마치며 (1)

박사학위가 나왔다. 만으로 4년 8개월. 외국에 한번 제대로 나가본 적 없는 토종 한국인으로서 미국의 소도시로 넘어와 길다면 긴 시간을 버텼다. 박사학위라는 종이 한 장이 주는 의미가 크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대단히 기쁘지도, 대단히 감격스럽지도 않았다. 인생을 10개의 챕터로 나눈다면 그중 하나의 챕터가 지나가고 새로운 챕터가 오는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인생은 연속적이어서 리자드가 리자몽으로 진화하듯 급격한 성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석사 대학원생 시절 한 컨퍼런스에서 세미나가 끝나고 조교수를 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젊은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교수가 되면 갑자기 대학원생 때와 다르게 세미나 발표 다 이해할 것 같죠? 그냥 모르는 거에 익숙해질 뿐이에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등 인생의 주요한 변화를 겪으며 우리는 그것이 곧 삶의 전환점이 되고 그 과정에서 진일보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관성은 생각보다 훨씬 튼튼해서 게으르던 나는 여전히 게으르고, 모르던 걸 똑같이 모르고, 똑같이 게임에 빠져 살며, 돈은 여전히 부족하다. 우리는 불연속적 퀀텀점프를 겪는 것이 아니라 시나브로 성장한다.


박사과정을 통해 배운 건 무엇인가. 적어도 박사과정 중 알게 된 전공지식은 아니었다. 이미 대학원생이라면 잘 알겠지만 박사과정 프로그램은 특별히 뭘 가르쳐주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공부할 시간과 명분을 제공해 줄 뿐이다. 아마도 박사과정 중 내가 체화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묵묵히 꾸준함을 유지하는 것만이 특별한 성취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졸업할 때가 되어서 부랴부랴 열심히 준비해 봤자 대단한 졸업논문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한 후의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묵묵히 지속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발전하는 속도는 너무나 점진적이어서 며칠, 몇 주, 몇 달 내에 성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성취하기 어려운 일일수록 더욱 심하다. 말하자면, 1만 시간을 투자해야 성과가 나타나는데 우리가 하루에 채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대여섯 시간 남짓일 뿐이다. 박사과정 졸업논문을 쓰기까지 단순히 박사과정 몇 년만 걸렸을까. 석사과정 2년 간 배운 전공지식과 연구경험, 학부과정 4년 동안 수강했던 경제학, 수학, 통계학 수업, 고등학생 시절 읽었던 사회과학 서적들이 모두 내가 연구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가가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별다른 가시적 성과가 없었던 노력들이 하나의 목표 아래에서 점진적으로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한 티핑포인트를 터치하는 데에 기여를 한 것이다.


그래서 꾸준함이라는 덕목이 중요하다. 시간을 인풋으로 하는 함수의 미분값, 즉 속도가 양의 값으로 고정된 경우 그 함숫값은 영원히 증가한다. 꾸준함을 가지는 것은 단순히 하루하루 일정한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속도를 양의 값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한결같이 꾸준한 사람은 남들이 달성할 수 없는 일을 기어코 해내는 역량을 지닌 것이다. 이 역량은 마라톤에서 쉬지 않고 뛰게 만들고, 인터넷 코딩 교육을 끝까지 수강하게 만들며, 몇 년간의 고시생활을 버티고 끝내 합격하게 만든다.


내가 아는 한 꾸준함은 모든 분야에서 가장 핵심적인 능력이다. 일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는 리틀야구단에 들어간 7살부터 매일 오후 3시 반부터 11시까지 피칭, 배팅 훈련을 했다. 이 훈련의 성과가 나타난 것은 7년 뒤 이치로가 중학생 야구부에 들어가 본격적인 게임을 뛰고 나서부터이다. 이 루틴은 그가 고등학교 선수 시절 역사상 없던 5할대 타자, 일본 리그 최초 7년 연속 타격왕,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3000 안타를 기록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이치로는 45세의 나이에도 현역 메이저리거로 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훈련 루틴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인적자본에도 복리의 마법은 존재한다. 투자에서 꾸준히 10%의 수익률을 유지한다면 원금이 30년 만에 20배 불어나듯이, 꾸준히 조금씩 성장하다 보면 몇 십 명이 모여도 해내지 못할 성취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똑같이 연구를 하고, 교수님들과 줌 미팅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민한다. 내가 하는 연구의 퀄리티가 갑자기 좋아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쉬워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묵묵히 하던 일을 같은 속도로 해나가는 것만이 내가 상상하던 성취를 이뤄내는 유일한 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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