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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킴 Aug 26. 2021

나더러 피어싱을 하라고?


“귀에 피어싱을 하나 하면 어때? 작은 걸로.”


아들이 뜬금포를 날렸다.

피어싱은커녕 그 흔한 액세서리 조차 하지 않는 아이가 상상 초월의 제안을 한 것이다. 무엇이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아들은 늘 매무새가 단정하다. 그래서 지가 피어싱을 하겠다고 해도 기절할 판인데, 엄마한테 하란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올라가서는, 사고는 남에게 치게 만드는 격이랄까.


딸이 이런 제안을 했더라면 건성으로 듣고 흘려버렸을 것이다. 양쪽 귀에 서너 군데나 구녕을 뚫은 입술 밑에 눈곱만  보석도   박고 있으니까. 게다가 딸내미는 줄곧  스타일이 지루하다며 변화를 주고 싶어 했으니,  어마 무시한 아이디어는 아들이 아닌 딸에게서 나왔어야 했다. 사실 나올 뻔했다. 딸도 생각은 여러  했지만, 감히 말을 붙일 용기가 나질 않았단다.  귓전에 장신구가 늘어날 때마다, 내가 인상을 써대는 바람에 지레 질려서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악역을 대신해준 오빠가 고마워 죽으려고 한다.



딸아이는 머리끝까지 흥이 차올라 피어싱 장식을 검색하고 질문을 해댔다. 화이트 골드와 옐로 골드  어느 것이  좋은지, 위치는 어디로  것인지  물어보며 혼자 열을 올렸다. 그러다  반응이 시큰둥하니까,  안건을 가족 투표에 밀어붙여버린다. 결과는 만장일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딸은 당연히 찬성. 남편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아이들 눈치를 보더니 삽초 간에 배신을 때렸다. ……. 기가 막혀서 무슨,  몸의 권리에 대한 무자비한 침해란 말인가.


사건의 시작인즉, 머리를 염색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에서 비롯됐다. 나이가 드니 두피가 건조해지길래 원래 모발 그대로 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나름 환경에 신경 쓴다는 내가 염색을 한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었다. 비닐 사용을 자제하고 욕실을 소다로 닦고 살면서, 독한 화학 약품을 머리에 바르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래서 아들과 수다를 떨던 와중에 ‘앞으로 엄마의 흰머리를 보게 될 테니 놀라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 아들은 내 결정에 백퍼 동조하고 격려를 해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면 딱 좋았을 것을, 피어싱이라는 스타일링 조언을 한 것이다.


“엄마는 머리가 짧아서 염색 안 하면 할머니 스타일이 돼버려. 근데 귀에 작은 피어싱을 하면 쿨해 보일걸?”

“아직은 검은 머리가 더 많아. 정성 들여 화장하고 옷을 깔끔하게 입으면 괜찮을 거야.”

“그건 누구나 하는 거잖아. 틀에서 벗어난 뭔가가 필요해. 이 기회에 변화를 줘봐.”

 ‘틀에서 벗어난 뭔가’라는 말을 떠올리니, 찢어진 청바지를 처음 입었던 날이 생각난다. 딸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데려오긴 했지만, 그걸 입고 나갈 용기는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너덜거리는 바지를 얌전한 블레이저에 받쳐 입었을 때의 쾌감이란! 아마도 그때 나는 나 스스로를 가둔 프레임에서 빠져나온 해방감을 느꼈나 보다. 변화가 싫어 버티다 그 변화를 좋아하게 되고만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찢어진 청바지는 자주 나의 선택을 받았고, 나의 애정템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지난 일을 돌이키니 피어싱도 같은 맥락으로 흐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이번엔 잔말 말고 빨리 항복해야 하나? 혹시 아는가. 노인네들이 피어싱을 즐기게 되는 세상이 올지. 그러면, 그때 나는 얼리 어답터가 되어 엣지있게 늙어있을 것이다. 그래. 용기를 내보자. 찢어진 청바지에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된다.


마음먹은 김에 인터넷에서 피어싱 장식을 골라본다. 귀에  끼는 링이나 깨알만  다이아몬드가  작은 귀에  어울릴  같다. 그런데 뚫을 자리는 정하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은 이왕이면 눈에  띄게 귓바퀴에 하라는데,  자리가 엄청 아프단다. 게다가 상처가 아무는데도 오래 걸린단다. …… 고민  해봐야겠다.


일단 변화된 내 모습을 그려본다. 찢어진 청바지에 반백의 쇼트커트, 그리고 귀에 작은 피어싱을 하고 있다. 온 가족이 함께 완성한 룩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따뜻함을 마음에 안고 가면 귀 뚫을 때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귓바퀴에 질러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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