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민망한, 하지만 생계를 돌보다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 이루기 힘들었던 소박한 계획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요? 제게는 영화 촬영 장소를 탐방하는 일이 그랬습니다. 근거지인 서울 곳곳으로부터 시작해 국내 구석구석을 다니고 해외까지 진출해보는 그림.
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계획은 계획에 그칠 뿐이었는데 며칠 전 우연히 날아든 한 제안이 '촬영지 순례'를 당장 실행에 옮기도록 했네요.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나서볼 것.
카메라를 든 순간에만 만끽할 수 있는 시간과 감정을 박제한다는 것이 특별함의 요지였습니다. 이 특별함은 영화 속 공간에 직접 뛰어드는 날을 보다 선명하게 '보존'할 수 있겠다는 예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가벼운 터치로 수십 혹은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고르고, 지우기를 반복하게 됐죠. 이는 유사한 순간의 선택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나 다름없을 텐데 어쩐지 희소한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겼던 터였습니다. 또 어느덧 '잘 찍은 사진을 뽑아내기'에 몰입하게 되니 카메라를 든 주체가 사라진 기분이었는데…….
단 한 번 셔터를 누름으로써 그날의 날씨, 분위기, 느낌 등을 결정짓는다는 것 자체가 구미를 당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상을 기다리는 동안에 결과를 상상하고 당시를 되짚는 일은, 얼마간 (자신이 주인공이 된) 영화의 여운을 즐기는 일과 닮아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서 필름 카메라를 들고 처음으로 나선 곳은 대체 어디냐고요? 그야말로 세계적인 인증샷 명소가 된 곳쯤은 가줘야 하지 않을까요? 시작은 역시 영화 <기생충>의 촬영지로부터.
기우가 민혁에게 과외 수업 부탁을 받으며 모든 서사가 펼쳐지는 돼지쌀슈퍼(우리슈퍼)를 기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축축한 어수선함을 그리고 간 자리에는 따뜻한 고요함이 번져 있어 첫 번째로 놀랐다고 할까요. 이내 영화적 설정을 믿고 동네의 이미지를 자연스레 못 박은 스스로의 안일함에 두 번째로 놀랐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생충> 촬영지라는 표지가 눈에 띄게 벽면에 걸려 있어 예전과는 다른 색을 갖는 것이 아닐까'라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문득 '치열한 삶의 현장이 행여 사소한 추억으로 소비되고 있진 않을까'라고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네요. 여러모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리곤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묘한 풍경이 기습하듯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천조각을 기운 듯 판자로 지어진 집이 사연 가득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돼지쌀슈퍼보다 더 큰 존재감으로 무심히 서있는데 괜스레 기택 가족의 이야기와 공명하는 지점을 상상하게 되더랍니다.
그 김에 주변 역시 둘러봤습니다. 골목 사이사이엔 옹기종기 자리한 집이 서로를 가려 만든 그림자가 곳곳에 눌어붙어 있었습니다. 길 위의 뚜렷한 명암을 보고 있자니 기우가 왜 그토록 너른 마당에서 햇볕을 만끽하고 싶었던지 한껏 이입이 되기도요. 누군가에게는 볕을 만끽하는 일이 대수롭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예삿일이 아님을 실감하며 걸었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기생충>의 상징, 자하문 터널의 숨은 계단이 다음 행선지였습니다. 이곳의 첫인상이 영화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은 돼지쌀슈퍼와 매한가지였네요. '자하문 터널=석파정 서울 미술관을 가는 길'이라는 아주 개인적이고도 낭만적인 공식을 떠올리는 와중엔 기택, 기우, 기정의 처절한 귀갓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혹은 날이 '너무 맑았던 탓'도 있었을 겁니다. 쨍한 햇빛의 효과는 <기생충>이 구축한 세계의 후문을 열고 나가보는 결과를 낳은 셈입니다.
물론 이제는 자하문 터널 계단을 살피며 잔혹한 계급 우화에 대해 떠올릴 공식 하나가 더 생긴 것만은 틀림없겠지만 말입니다.
'미뤄온 계획'과 '필름 카메라'의 우연한 조합으로 출발한 영화 이야기. 영화를 떠올릴만한 공간과 순간을 직접 포착해 보는 수필 기행은 계속됩니다. 촬영지를 다니는 일뿐만 아니라 일상의 여러 단편이 그 대상이 되겠지요. 작품 자체의 메시지가 증폭되는 경험을 전달하면서도 사적인 경험이 버무려진 독특한 인상을 공유하는 그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