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김한빈
끝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긴 어둠의 사슬이 풀리는 찰나입니다
숨죽이며 목소리 낮춘 자세를 이제 거둘 수 있겠습니다
강물이 바다에 다다라 슬픔을 풀어놓듯
연어가 상류를 거슬러 올라 기쁨을 풀어놓듯
끝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긴 어둠의 사슬이 풀리고 눈부신 세상이 드러나는 찰나입니다
숨죽이고 목소리 낮춘, 낮은 포복의 자세를 이제 거둘 수 있겠습니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한 낙타가 무릎을 접고 슬픔을 풀듯
바이칼 호수를 떠나 우포늪으로 날아온 고니가 기쁨을 풀 듯
어둠은 고통의 시간만이 아니었습니다
한겨울 묵주를 세면서 묵상하는 수도승은 어둠 속에서 빛을 봅니다
한여름 결가부좌를 틀고 참선하는 수도승은 어둠 속에서 빛을 봅니다
어둠은 마음속에 비석처럼 서 있을 것입니다
히말라야산맥에 덮인 눈처럼 흰빛으로 남아
백두산 천지에 고인 물처럼 푸른빛으로 남아
끝이 끝나는 순간
긴 어둠의 사슬이 풀리고 눈부신 세상이 드러나면 눈이 멀어버릴 수 있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눈을 얻어 더 숨죽이고 목소리 낮추고 더 어깨를 웅크린 낮은 포복의 자세를 지키겠습니다
마치 산이 땅 밑으로 내려가듯
- 터널을 통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문예종합계간지 <문장 21> 2023년 가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