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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Feb 17. 2024

광인일기(狂人日記) 1 - 지우개

광인일기(狂人日記) 1 - 지우개       

                                                    김한빈


        

 1.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림자의 테두리를 지우개로 지운다

그림자의 임자도 지운다   

  

2.

해는 그림자를 보지 않는다

그림자도 해를 보지 않는다 

    

해는 언제나 모든 사물의 앞을 보되 뒤를 보지 않는다

온누리를 골고루 비추는 해도

사실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비출 뿐이다

가끔 해가 물상을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지우려 해도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 

    

그림자를 보면 해가 아니다

해를 보면 그림자가 아니다     


3.

누가 바다 위에 수평선을 그었는가

이름은 있되 존재하지 않는

수평선을 지우개로 지운다 

    

하늘과 바다가 경계를 잃고 

바다에 누운 하늘이 댐 방류하듯 쏟아지고

바다는 공중으로 치솟는다  

   

하늘과 바다를 지우개로 지운다



<문학도시> 2024년 2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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