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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Dec 11. 2021

“우리는 과연 현대시를 쓰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현대시를 쓰고 있는가

                                                                                      시인평론가  김한빈



  오늘날 우리 문단은 시단의 저변 확대라는 대중성 확보와 시의 품격을 고양해야 하는 본래 의무 사이에 놓인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그러나 이 모순이 언제나 상충하는 것만은 아니다. 토양이 넓고 땅이 기름지면 품질 좋은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과연 현대시를 쓰고 있는가’라는 시인 자신의 엄정한 자기반성이 수반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전통시의 미당 서정주 시대도 아니요, 민주화 투쟁의 고은 시대도 아니다. 일인칭 경험적 자아를 내세운 과거 회귀적인 복고풍의 제재를 다룬 시를, 또는 민중 이데올로기에 따라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의 애환을 노래하는 시를 현대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한 시 작품들이 21세기 현대시의 변두리에 머물 수는 있어도 현대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탈근대주의 담론이 유행하고 해체시, 난해시가 등장한 지도 상당히 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시다운 현대시는 어떤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가.


 시는 가장 주제적인 장르다. 시적 대상인 ‘노에마’에 시적 화자의 ‘노에시스’라는 주관적이고 강렬한 정서적 작용이 일어나서 단일한 주제를 형성한다. 이때 “시들의 주체는 시인의 경험적 자아가 아니다. 개성이라는 우연이 제거되고 현대성을 대표하는 중성적인 자아가 시 창작의 주체가 된다.”라고 후고 프리드리히는 「현대시의 구조」에서 말한다. 


 보들레르가 19세기 중엽에 ‘악의 꽃’을 발표했을 때, 그는 현대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거장 쇤베르크가 조성 음악을 해체하고 불협화음을 도입하기 전에, 보들레르는 현대성의 필연적인 산물인 불안, 무출구성, 이상성 앞에서의 좌절 등과 같은 불협화음적인 내면을 형상화했다. 이에 따라 그는 개인적인 심정의 도취에 빠지지 않는 몰개성론과 상징주의 시 창작 방법을 제시했다.


  일제 강점기에서 우리의 시인들은 보들레르가 역설한 상징주의 수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훌륭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20년대 주요한과 소월 그리고 한용운, 30년대 영랑과 지용 그리고 이상, 40년대 이육사와 윤동주, 이들의 주옥같은 대표시들은 거의 상징주의 수법으로 창작된 것이다. 광복 이후 50~60년대 신동엽, 김수영, 김춘수 그리고 70년대 황동규 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보들레르 사후 150년이나 더 지나간 지점에 서 있다. 이상이 ‘오감도’를 발표한 지도 90년 가까이 된다. 그런데도 현대시의 특징인 탈개성론은 차치하더라도 아직도 비유가 시적 진술의 요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표현 대상(원관념)과 표현된 것(비유된 것) 사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두 대상을 연결하는 것이 비유이다. 이와 달리 상징은 표현 대상은 숨겨지고(원래 없고) 표현된 것(상징)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시의 형상화 방법은 ‘상징’이다. 은유로 획득된 비유적 심상은 작품 속에서 부분적인 가치를 갖는다. 반면 상징적 이미지는 시 전체를 관통하는 지배적 심상(모티프)이 된다. T.S.엘리어트의 말대로 객관적 상관물이 된다. 그 가운데서도 전통적‧관습적 상징을 버리고 그 시인만의 개인적‧창조적 상징을 만드는 것이 시인의 역량이다. 


  한편 하이데거는 현대를 신들이 떠나 버린 ‘궁핍한 시대’라고 부른다. 그는 “세계는 황폐해졌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린 시대”라고 비판한다. 그는 고흐의 농촌 아낙네의 ‘구두’를 분석하면서 존재자(개별 사물들)에게서 존재(사물들을 있게 한 것, 또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예술 작품의 본질이요, 예술 작품의 근원으로서 시작(詩作)의 본질이라고 한다.


 상징은 이런 맥락에서 가장 유효한 시의 장치가 된다. 상징은 흔히 소극적 능력이라고 한다.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감추는 이중적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사물이나 현상에 숨겨진 ‘존재’를 드러내는 것, 즉 존재의 비은폐성을 추구하는 것이 상징이다. 대지에 충만한 사물들에게서 숨겨진 진리(존재)에서 탈은폐성을 구현해 내는 것이 시의 본질이고, 이것은 상징에 의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은 사물이나 현상을 끊임없이 낯설게 바라보고 의미를 발견하거나 부여해야 한다. 시는 개인적 상징 또는 창조적 상징이 있어야 비로소 현대시가 된다.


 시인은 현대사회의 한 구성원이고, 따라서 현대사회의 불협화음 속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부자유와 긴장을 느끼며 살아간다. 소설 작가는 일반적으로 부정적 현실을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신랄하게 해부하는 작업을 한다. 반면 시인은 시적 상상력으로 현실의 질곡을 초월할 수 있다. 또는 고답한 태도로 먼지 이는 현실과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시인은 대승불교의 보살처럼 병든 세상 껴안고 함께 아파하는 자세를 견지하거나, 윤동주처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릴 수도 있다. 이때 시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자 현실 극복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별이 될 것이다.


<문장21> 통권 55호 겨울호, 권두 에세이 수록 (20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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