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빈 시집 '시지프스의 노래'
시작(詩作) 노트
시작(詩作) 노트
이 시집은 전체를 네 영역 1부 ‘전통문화’, 2부 ‘불교’, 3부 ‘자연과 풍경’, 4부 ‘모던’으로 분류하였다. 여기 수록된 70여 편의 시들은 주로 등단 잡지인 종합 문예 계간지 『문장 21』, 동인지 《상상》과 《새글터》, 남구문인협회 기관지 『오륙도문학』과 부산문인협회 기관지 『문학도시』, 새로 출범한 종합 문예 계간지 『문예창작』 등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80년대 전후에 창작한 작품들 중 일부를 이 시집에 게재하였다. 시의 해설은 인연 있는 시인이나 평론가가 해주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시작(詩作) 노트’라는 이름을 빌려 굳이 자전 해설하는 것은 본인이 직접 시 창작 과정의 전말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더 진솔할 것이라는 기대 덕분이다.
시인의 말
달을 긷는 원숭이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킬지언정/ 손으로 만질 순 없다./
연못 위에 뜬 달은/ 그림자요, 물거품이어도/ 손으로 잡을 듯하네./
물에 뜬 달이/ 삶이요, 시(詩)일는지 모른다.//
밤새워 달을 긷는 원숭이의 마음은/ 황홀하구나.//
1부 전통문화
이 시집의 대표적인 작품인 「시지프스의 노래」, 「까치집」, 「산정운무(山頂雲霧)」, 「세한도(歲寒圖)」, 「장자(莊子)의 손톱」 등이 1부 ‘전통문화’에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 특히 「시지프스의 노래」는 위의 『문장21』을 통하여 등단할 때 발표했고 이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작품이다. 그 밖에도 ‘게걸음’을 풍자한 시 작품과 ‘바둑 연작 4편’과 ‘술꾼 연작 4편’, 그리고 ‘심청전’에서 착안한 「인당수」, 「공양미 삼백석 1, 2」 등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작품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고시조 4편을 인용하면서 대립되는 두 편의 시조 종장을 바꿔치기하여 절대 가치의 상실과 가치관의 혼돈을 표현하려고 했다. 끝으로 「배변-시詩 혹은 삶」은 이 시집의 프롤로그로 제시한 ‘시인의 말’ 「달을 긷는 원숭이」와 관련이 있다.
겨울 교목의 고요한 높이에/ 잔가지와 진흙으로 나는/ 소슬한 집 한 채 짓는다.//
작(鵲) 작 까악 작//
쉽게 오를 수 없는 높이에/ 집을 짓는 것은/
사람을 멀리하기보다/ 세상을 한 발 물러서서 보려는 까닭이요,//
낙엽같이 가벼운 날개로/ 더 깊은 하강(下降)을 하려는 뜻이다.//
작 작 까악 작//
삭풍이 불어올 때/ 떼 지어 남쪽으로 떠나지 않고/ 집을 짓는 것은/
겨우내 몸을 움츠리기보다/ 별을 한 발 가까이 보려는 까닭이요,//
바람처럼 가벼운 날개로/ 더 높은 비상(飛上)을 하려는 뜻이다.//
작 작 까악 작//
「까치집」 전문
이 시는 전체 구성이 전반부와 후반부가 하강과 상승이란 대립적 지향을 보이며 대칭적 구조를 이룬다. 까치가 집을 짓는 행위는 두 가지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전반부의 ‘쉽게 오를 수 없는 높이에/ 집을 짓는 것은/ 사람을 멀리하기보다/ 세상을 한 발 물러서서 보려는 까닭이요,//’, 이것은 세속과의 단절이나 고답적인 태도가 아니라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조적 자세로 세상을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현실에의 관심과 참여(‘더 깊은 하강(下降)’)를 내포하고 있다. 후반부의 ‘삭풍이 불어올 때/ 떼 지어 남쪽으로 떠나지 않고/ 집을 짓는 것은/ 겨우내 몸을 움츠리기보다/ 별을 한 발 가까이 보려는 까닭이요,//’, 이것은 부정적 현실 앞에 봉착할 때 철새와 달리 도피하지 않고 삶의 희망을 지향한다는 의미이다. 엄혹한 현실이 오히려 정신적 고양(‘더 높은 비상(飛上)’)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작(鵲) 작 까악 작’, 이 후렴구는 까치 울음소리인 의성어를 까치 작(鵲)이라는 한자로 변용하여 우리 시가의 전통 운율인 ‘a, a, b, a’를 살렸다.
내 마음속 눈을 이고 있던/ 잣가지 부러질 때 홀연히 떠나련다.//
바다 한가운데 외로운 섬 탐라/ 소나무 비스듬히 누운 집을 찾아/
가시 돋친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치련다.//
"며칠 폭설이 내려 백록담 인적 끊어지고,/ 아내의 부음을 받은 어젯밤,/
눈을 이고 있던 잣가지 부러지는 소리,/ 화로를 안고 책장 넘기는 손이 곱네[凍].//
마른 붓을 들어 '세한도(歲寒圖)'*를 그리니,/ 고목이 된 소나무 비스듬히 집에 기대어 있네./
우선(蕅船), 보게나.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 소나무 잣나무가 아직 시들지 않았구나.//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나는 완당 노인을 찾아 천리를 가니/ 주인은 소식(蘇軾)을 만나러 만리를 갔네.//
빈집에 홀로 남아/ 눈밭에 말없이 서 있는/
소나무 잣나무 붙들고 울다/ 가시 돋친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치련다.//
주) '세한도(歲寒圖)'는 송(宋)나라 소동파(蘇東坡)가 그린 언송도(偃松圖: 누운 소나무)*와 관련 있다고 한 다. "~" 부분은 추사의 내적 독백이다.
「세한도(歲寒圖)」 전문
추사의 세한도에는 그의 ‘가시 돋친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친’ 제주도 유배 생활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고목이 된 소나무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그의 집은 세상과의 단절과 고립, 그리고 고결한 지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내의 부음을 받은’ 것이 유배지에서 겪은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세한삼우(歲寒三友) 가운데 으뜸인 ‘소나무와 잣나무가 아직 시들지 않은’ 것은 제자 ‘우선(蕅船)’과의 관계가 변함없음과 그 자신의 절개도 그대로인 것을 뜻한다. 시적 화자 또한 삶을 지탱하는 정신적 가치가 전도될 때 자발적인 유폐와 은둔적인 삶을 선택하고 추사의 정신세계를 본받으려고 한다(‘나는 완당 노인을 찾아 천리를 가니’). 그러나 추사는 이미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어 있어(‘주인은 소식(蘇軾)을 만나러 만리를 갔네.’) 만날 수 없다. 결국 화자 스스로의 힘으로 결핍과 부재라는 부정적 현실을 극복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성지(聖地)를 찾아 떠나리./ 한 줌 물로 영혼을 씻기 위해 낙타를 타고 떠나리.//
이 밤 어디선가 우리의 어리석음을/ 죽비로 꾸짖는 스승을 찾아 떠나리.//
거리엔 황홀한 불빛들,/ 밤을 지키는 성벽 파수병들,/
드디어 스승은 주장자(柱杖子)를 울리는구나.//
무릎 꿇은 낙타여/ 아, 슬퍼하지 말아라./
신기루 사라진 모래 언덕 너머/ 불 밝힌 오아시스가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날이 새기 전/ 한 모금 목을 적시리./ 어디선가 낯선 바람이 불어오고/
사자 울음소리 들리는구나./ 놀란 늑대 무리들아, 흩어져라.//
어느 선지자가 길어온 샘물을 마시고/ 우리는 아이로 다시 태어나리라.//
「순례자」 전문
우리의 삶이 종교적 신앙과 별개로 성지순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사막과 같이 삭막하고 황량한 현실에서 병든 영혼을 순수한 물로 씻기 위해 성소(聖所)를 찾아 떠나고 싶다. 그곳에는 주장자를 울리는 선지자인 스승이 우리에게 깨우침을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한평생을 살아가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포기할 수 있다. 그런데 판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변화를 재촉하는 ‘낯선 바람’이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킨다. 늑대 무리들 속에 파묻혀 있던 사자는 ‘사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비로소 자신이 사자인 것을 깨닫는다. 순수한 인간, ‘아이’로 재탄생한다. 여기서 ‘낙타, 사자, 아이’의 이미지는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용했다.
산은 몸살로 앓아누워/ 온통 열꽃이 피고/ 마른기침소리가 계곡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새벽까지 내린 비로/ 눈물자국 다 지우지 못한 산길은/
헐벗은 관목숲을 지나 겨울로 이어졌다.//
산 아래는 가을/ 산 위는 겨울//
배낭을 멜 때 어떤 기대를 담지 않았다./ 인생도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구름과 안개가 끼이면/ 가까이 걸어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산정(山頂)에 서면/ 두고 온 세상을 굽어보고/ 문득 깨달음을 얻어/
겨드랑이에 깃이 돋아 하늘로 솟아오를까 보다./
뜻 한 번 펴지 못한 사내의 용렬함을/ 탄식만 하랴.//
인생은 홀로 오르는 산길./ 몇 걸음 걸으면 등산객들/
짙은 운무(雲霧) 속으로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
산 아래는 가을/ 산 위는 겨울//
산꼭대기엔 나보다/ 먼저 도착한 구름과 안개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정운무(山頂雲霧)」 전문
삶은 때때로 깊은 허무 의식이나 비애감에 젖는다. 이 시엔 이러한 페이소스(pathos, 연민 또는 비애))가 가득차 있다. 단풍 든 산에 가을비가 그치고 산행이 시작된다. ‘집안에서 울고 길 위에서 웃는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현실과 거리를 두면 웃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산정에 서면 일상의 용렬함에서 벗어나 기대하지 않았던 호연지기나 대붕(大鵬)의 자유를 느낄 수 있을까. 그러나 삶은 어느덧 깊은 가을을 맞이하고 고독할 뿐이다. 현재의 현실은 쓸쓸한 가을이고 가까운 미래인 산정엔 벌써 겨울이 자리잡고 있다. ‘산 아래는 가을/ 산 위는 겨울// 산꼭대기엔 나보다/ 먼저 도착한 구름과 안개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허무 의식은 가끔 삶의 근원적 감정이고 삶의 진실처럼 다가온다.
누구나 마음속에 산이 있다./ 그 산은 세월을 쌓아올린 탑.//
그 높이만큼 바위를 밀고 올라온 사람들/
이젠 바위를 잃고 산정에 선다,/ 교회 첨탑 꼭대기에 서듯.//
정오의 시각/ 시지프스는 산정에 홀로 서서/번민하는 이마로 낯선 바람을 맞는다.//
어떤 이는 빈손을 흔들며/ 허무의 숲 속으로 사라지고,/
어떤 이는 고난의 신발을 벗어놓고/ 계곡 아래로 몸을 던진다.//
알 수 없구나./ 산 위로 밀고 올라왔고/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 바위는 무엇인가./
동굴 속에 앉은 달마가 화두를 잡는다,/ 이머꼬.//
화두를 깨쳐야/ 바위를 찾으러 산을 내려가리라.//
산정에 홀로 선 시지프스/ 낯선 바람을 맞는다.//
「시지프스의 노래」 전문
‘누구나 마음속에 산이 있다.’ ‘그 산은 세월을 쌓아올린 탑’이다. 중년 고개를 넘으면 어느덧 산꼭대기에 올라선다. 평범한 일상인은 산꼭대기까지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밀고 올라온 바윗돌이 저 산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굉음을 들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지나온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서서 ‘번민하는 이마로 낯선 바람을 맞는다.’ ‘어떤 이는 빈손을 흔들며 허무의 숲 속으로 사라지고’, ‘어떤 이는 고난의 신발을 벗어놓고 계곡 아래로 몸을 던진다.’ 그런데 자기가 온몸으로 밀고 올라온 바윗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산꼭대기에 ‘정오’의 해가 높이 떴다. 니체의 말대로 각성과 재생을 재촉하는 햇살이 뜨겁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삶의 포기, 종교적 초월, 이것도 아니라면?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산골짜기 아래로 잃어버린 바윗돌을 찾으러 묵묵히 내려간다. 바윗돌을 찾아 다시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또 굴러떨어질 바윗돌을 찾아서. 이것은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이다. 바위를 밀어 올리고 다시 찾아서 밀어 올리는 일은 영겁회귀처럼 무한 반복되는 무의미한 노동이다. 프랑스 작가 카뮈는 여기에서 ‘부조리’를 발견한다. 그는 바윗돌을 찾으러 내려가는 시지프스에게서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무의미성을 자각한 시지프스가 가혹한 자기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신들에게 반항하는 유일한 방법을 찾는다. 인내하는 것이다. 오히려 더 열심히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이다. 카뮈의 이러한 해석에서 허무주의의 혐의를 느낄 수 있다. 아무리 ‘반항하는 인간’이라도 결국엔 무의미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역설적으로 ‘창조’를 강조한다.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애써 밀고 올라온 바윗돌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 본다. 그리고 그 바윗돌을 낯설게 바라본다. 경이로운 감정을 품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세계는 얼마나 거대하고 경이로움으로 가득한가. 그 속에 사는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연민과 공포를 품고서. 바윗돌은 어쩌면 삶의 의미이거나 인간과 인간의, 인간과 세계의 바람직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한편 잃어버린 바위를 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의 첫 단계, 곧 ‘심우(尋牛)’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동굴 속에 앉은 달마’처럼 화두를 잡는다. 진정한 자아, 아트만(atman)을 찾아서.
매일/ 손톱을 깎으며/ 나비꿈 꾸는 장자/
지구 자전 속도보다 더 빨리 자라는/ 손톱 때문에 고민이다./
손톱이 긴 나비를 본 적 없는 장자/ 오늘도 초승달같이 쌓이는/ 손톱 앞에 무릎 꿇는다./
나비 되어 구만리 높은 하늘 올라/
어느 별 작은 연못 속 금붕어 한 마리 키우려면/ 어쩔 수 없다./
아내 죽은 날 대야 두드리며 노래 부르던 장자/
거울 닦는 늙은 중처럼/ 바늘귀 찾는 할멈처럼/
매일 손톱을/ 깎는다.//
「장자(莊子)의 손톱」
손톱을 깎는 행위는 누구나 겪는 일상적인 일이다. 대붕의 소요유(逍遙遊)를 추구하는 장자도 손톱 깎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이 행위는 인간 삶의 근원적 조건을 상징한다. 이 조건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아내 죽은 날 대야 두드리며 노래 부르’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던 장자도 대자유(‘금붕어’)를 얻을 수 없다. ‘거울 닦는 늙은 중처럼/ 바늘귀 찾는 할멈처럼/’ 탈속의 오랜 구도자이든 세속의 눈 어두운 늙은 아낙네이든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매일 손톱을 깎’아야 한다.
도화동 심청이를 울울울 몸 깊은 곳에 품었겠다./ 울렁울렁./
뱃머리를 비틀비틀 보쌈 자루처럼 풍덩./
다시 연꽃으로 피어나 바깥 세상에 나갈 때까지./ 출렁출렁./
내가 뱃전을 탕탕 치며 울울울 소리쳤겠다./ 울렁울렁.//
청아, 몸을 던져라 두려워 말고/ 갈매기 날으듯 어미 품에 안기렴./
물결은 울울울 뱃전을 탕탕/ 북은 두리둥 두리둥 둥둥.//
치마 둘러쓴 청아,/ 눈물을 씻어주마/ 잔디밭 눕듯 어미 품에 안기렴.//
둥둥 물길을 열어라/ 용궁 가는 문.//
눈을 뜨고 포기하지 말아라/ 삶이 모두 기적이다.//
「인당수(印塘水)」 전문
심청이가 인신공희(人身供犧)로 몸을 던진 곳이 바로 ‘인당수’이다. 인당수 물이 시적 화자로 설정되어 그의 시각으로 시적 대상 심청이를 바라보고 말을 건넨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 인당수는 마치 옥황상제와 같이 모든 진실들을 다 알고 있다. 뱃사람들이 북을 치며 투신을 재촉하지만 그 이후의 사건들, 심청이가 물속에 빠져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과 용궁으로 인도되어 어머니와 상봉하게 될 일과 심청이가 다시 세상에 나가 황후가 되고 아버지 심학규와 재회하게 될 일을 다 알고 있다. 비극이 해피엔딩으로 반전된다. 판소리계 소설 ‘수궁가’에서 독특한 어조와 의성어 등을 빌려왔다. 사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대목까지가 현실 이야기이다. 그 이후의 재생과 신분상승, 부녀상봉 등은 민중들의 소망이 투영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민중의 현실 극복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2부 불교
대승 불교의 보살 정신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보려는 노력이 담긴 시 작품들을 2부 ‘불교’에 수록하였다. 선종(禪宗)의 화두를 들고 살아가는 것이 속세에 사는 일상인의 모습일 것이다. 이 간화선(看話禪)을 하나씩 깨우쳐간다면 삶의 인식 지평이 새로워지리라 여긴다. ‘선(禪) 연작시’를 실제로 많이 썼지만 이 시집엔 5편만 수록한다. 이 중에 「선(禪) 2 – 자벌레」는 등단할 때 발표했고,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화두를 통해 보살 정신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하려고 하였다. 「돌부처의 소리」는 공(空) 사상을 표현하려 했고, 「달마의 백팔 배」는 오랜 백팔 배의 경험에서 얻은 작품이다.
길 없는 허공에 한 발 내딛고/ 비로소 길이 열린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너는 무엇을 찾으러 나무 꼭대기에 올랐느냐/ 문득 길 끊어지고/ 무(無)!/
그곳엔 아무것도 없구나/ 빈 바람소리뿐.//
저 아래/ 비 맞고 먼지 덮어쓴/ 풀과 돌멩이를 보라/
네가 찾던 세상이 거기 있지 않는가.//
구름이 땅의 물로 돌아가듯/ 높은 곳에 오르면/ 그만큼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법.//
그대, 서쪽에서 온 조사(祖師)*여!/
물이 웅덩이를 메우며 낮은 데로 흘러/ 바다로 가 본래 하나가 되는구나.//
길 없는 허공에 한 발 내딛고/ 비로소 길 열린다.//
백척간두 진일보.//
*조사(祖師):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선종을 창시한 달마 대사
「선(禪) 2 – 자벌레」 전문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화두를 제재로 삼은 시 작품이다. 자벌레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높은 장대 끝에서 ‘한 발 내딛’는다. 온몸을 던져야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린다.’ 깨달음을 얻은 보살은 ‘비 맞고 먼지 덮어쓴/ 풀과 돌멩이’ 곧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다시 ‘구름이 땅의 물로 돌아가듯/ 높은 곳에 오르면 그만큼 낮은 곳으로 내려가’듯이 속세로 복귀하여야 한다. 깨달음이라는 인식의 높이에만 머물지 않고 병든 세상 껴안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대승 불교의 정신이다. ‘물이 웅덩이를 메우며 낮은 데로 흘러/ 바다로 가 본래 하나가 되는구나.’, 이 구절은 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며 궁극에는 그와 일체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밤길 밝히던 등불을 끄니/ 비로소 길이 보인다.//
잃어버린 소 잔등에 올라 피리를 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주인이 된다.//
비로소 세상이 보인다.//
저 강을 건너면 복사꽃 핀 언덕이라도/ 부처 혼자 살 수 있나.//
쇠창살을 젖히고 소 몸통은 나왔으나/ 아직 꼬리가 남았다.//
밥 한 그릇 먹고 깨달음 얻은 곳/ 밥 한 그릇만큼 그 소식 알릴 곳.//
「선(禪) 6 - 꼬리가 남았다」 전문
이 시의 제재는 ‘쇠창살을 젖히고 소 몸통은 나왔으나/ 아직 꼬리가 남았다’라는 화두이다. 소 몸통이 쇠창살을 젖히고 나온 것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고, 꼬리가 남은 것은 그 깨달음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해석은 두 가지가 가능하다. 먼저 깨달음 이후에도 그 깨달음을 꾸준히 닦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의미와 같은 맥락이다. 한편 깨달음이 원래 완전할 수도 없지만 불완전한 것은 아직 실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관점도 있다. 이는 깨달음이 개인의 인식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는 사회적 실천을 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대승 불교의 의미이다. ‘등불’은 기존의 가르침이다. 이것에 구애받을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심우도(尋牛圖)의 과정에서 기우귀가(騎牛歸家: 잘 길들여진 소를 타고 마음의 본향인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단계)할 때도 ‘부처’(여기서는 절대적인 기존의 가르침)를 만나면 그것마저도 극복하여야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임제 선사의 말이다. 설령 피안(彼岸)의 경지(‘저 강을 건너면 복사꽃 핀 언덕’)를 찾았어도 깨달은 자 혼자 사는 것은 참된 인생이 아니다. 보살은 중생과 함께 해야 비로소 그 깨달음이 완성된다.
꽃 피던 사월 달력을 넘기니/ 1, 8, 2, 16, 3, 10, 4, 25 ---/
꽃 피지 못한 날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살아있음이 꿈같고 환영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네.//
산이 울긋불긋 온통 잔치이더니/ 말 없는 부처님은 반쯤 졸고 있는데,//
초파일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탑을 도는 여인네 고무신 타는 냄새.//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연꽃 피지 않은 연못을 서성이는 바람/ 보리수 새잎처럼 푸르구나.//
가는 곳마다 임자 되면/ 달이 이지러져도 어때?/ 절 뒷산이 땅 밑으로 들어가도 어때?//
대웅전 풍경 소리 듣던 모란/ 꽃을 피운다.//
「선(禪) 7 - 사월 초파일」 전문
새해를 맞이하고 초파일을 앞둔 오월이 되면 벌써 초여름 날씨가 되면서 한해의 1/4이 지나간다. 꽃 피던 4월 달력을 떼는 것이 언제나 마음 아프다. ‘1, 8, 2, 16, 3, 10, 4, 25 ---’은 달력의 숫자들이 떨어지는 것을 시각화했다. ‘꿈같고 환영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네’, 이 구절은 금강경의 유명한 설법을 인용했다. 머무는 곳에서 주인이 되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자리(‘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라 한다. 이는 내 삶의 주체가 내가 되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연꽃 피지 않은 연못’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탑을 돌며 간절한 소원을 비는 ‘여인네’와 마찬가지로 연못을 서성이는 오월의 ‘바람’(중생)은 ‘보리수 새잎처럼’ 푸르고 싱그럽다. 자신이 깨달음을 얻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면 타자(他者)의 시각에 설령 이지러진 달처럼 보여도 현상과 달리 자신의 본질은 변함없으며, 산이 땅 밑으로 들어가는 형상처럼 아무리 겸손해도 허물이 없다. 이것은 각각 불교 경전과 주역 겸괘(謙卦)에서 착안한 것이다. 끝으로 이 시에 쓰인 여러 가지 불교적 상징과 호응하는 ‘모란’이 ‘대웅전 풍경 소리’를 듣고 ‘꽃을 피운다’는 깨달음에 대한 열망과 불교적 정밀 감(靜謐感)을 제시하여 시상을 마무리했다.
3부 자연과 풍경
「풍경 연작시」들 일부를 여기 3부 ‘자연과 풍경’에 수록하였다. 그중 「풍경 1」은 등단 작품이다. 이 연작시들은 산문시로서 모두 의도적으로 한 문장으로 된 시다. 우리말의 특징 중 대등적 및 종속적 연결어미가 유별나다. 이 어미를 잘 활용하면 모든 문장들이 하나로 연결된다. 특히 우리말의 묘미는 종속적 연결어미가 살려준다. 어떤 독자가 이 시편들을 ‘따뜻한 풍자’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원래 골계미(滑稽美)를 드러내는 풍자는 웃기면서 비판하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풍경 연작시」에도 비판 정신이 살아있지만 신랄하지 않다. 대상을 비꼬면서도 애정을 품는 새로운 풍자를 시도해 보았다. 「풍경 2」는 약국 간판을, 「퐁경 3」은 부산의 명물 해운대 마린시티를 풍자했고, 「풍경 4, 7」은 경성대 앞 지하철 2호선에 탄 당시 젊은이들과 청춘 해방구인 대학가 풍경을, 「풍경 5」는 우리나라 중년 등산객들을 풍자했다. 「풍경 6」은 편백숲의 의미를 찾아보았고, 「풍경 10」은 지방선거의 모습을 풍자했다. 한편 「달과 볼락」은 80년대 쓴 작품으로 모던한 스타일이지만 3부 ‘자연과 풍경’에 넣었다. 이를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적인 것으로 수용한 경향으로 볼 수 있다. 「산 2」도 실은 연작시이지만 3부에 한 편만 수록하였다. 끝으로 「황령산」은 각별한 애정이 담긴 시 작품이다. 마음속 화두를 들고 고뇌했던 과거의 시가 「시지프스의 노래」라면 이 작품은 그것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현재의 성찰이 담겨 있다.
어떤 섬에는 무수한 새들이 공중에서 똥을 누는데, 날개를 퍼덕이면서 똥을 누는데, 이상하게도 그 똥은 흰색 회색 페인트 같아서 섬을 에워싼 바위 위로 떨어져 덕지덕지 유화를 그리는 듯한데, 한편으론 그 그림은 마치 새들의 공화국에 필요한 헌법 같기도 하고, 물론 매일매일 수정헌법을 다시 쓰긴 하지만, 한편으론 그들 각자의 일기를 써서 역사를 기록하는 것 같기도 해서, 아닌 게 아니라 똥으로 제법 독특한 문명을 이루는 것 같다.
「풍경 1 ㅡ 새똥」 전문
이 시 작품은 한 문장으로 된 산문시이다. 어떤 섬은 국회 의사당이 있는 여의도 같기도 하고 민초들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더 다양한 해석은 그야말로 ‘독자의 몫’이다. 섬에 사는 새들의 배설을 독특한 풍자의 수법을 빌려서 해학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달은 반달로 떠서/ 찰 것인지 기울 것인지/
제 스스로 운세를 점치고/ 낚싯대가 울린다.//
무엇이 걸린 걸까/ 해저에 사는/ 눈망울이 툭 불거진 볼락일까.//
무겁게 숨쉬는 섬들이/ 판화처럼 살아나고/ 또 낚싯대가 울린다.//
몸이 납작해야 살 수 있다는/ 조상 전래의 처세술을/ 아직 익히지 못한 놈일까/
낚싯대 끝에 기울어진 달이 걸린다.//
「달과 볼락」 전문
통영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볼락 낚시하던 어느 겨울날의 풍경이다. 새벽달이 반달로 떠서 마치 인간 세상의 운세를 점치는 듯한 분위기이다. 80년대의 암울한 현실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에서 ‘눈망울이 툭 불거진 볼락’을 통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삶과 민생고에 허덕이며 ‘몸이 납작해야 살 수 있다’는 민중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려고 했다. 이때 낚싯대는 현실 진단의 촉수요, 청진기가 된다. 결국 낚싯대는 ‘기울어진 달’을 건짐으로써 현실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암담하다.
바람고개 넘어 사자봉 건너/ 산이 쌓아올린 그 높이에 오른다.//
푸른 편백 숲이 곧게 서서/ 장대비 맞고 때론 눈바람 쐴 때/
산은 그 높이를 묵묵히 쌓아올렸다.//
내가 올라온 길/ 누가 이끈 듯 꿈결 같아도/
몇 갈래 길과 그 높이에서 만나/ 서로 부둥켜안는다.//
산다는 건 어떤 길을 걸어도/ 산이 쌓아올린 그 높이에 오르는 것/
결국 산의 그 높이가 문제다.//
만일 다른 길로 왔다면/ 찬란한 아침 해를 보거나/ 핏방울 스민 저녁놀을 보거나/
더 굽이치는 길을 따라/ 그 높이에 닿았을지도 모른다.//
산다는 건 어떤 길을 걸어도/ 산이 쌓아올린 그 높이에 오르는 것/
결국 산의 그 높이가 문제다.//
오는 길에 언뜻 들었을까/ 대숲 옆 산절 마당에/ 흰 구름 흐르는 소리.//
하산길에 들을 수 있을까/ 산이 그 높이를/ 스스로 낮추는 소리.//
「황령산」 전문
로버트 프로스트는 명시 ‘가지 않은 길’을 남겼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젊은 시절 가지 않은 길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때로는 후회하는 심정으로 회고하기도 하고, 자신이 선택한 길이 운명의 길임을 깨달으며 미련 없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 시는 프로스트와 주제가 다르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갔어도 결국 산의 꼭대기에 오른다. 산정에 올라 돌아보면 여러 갈래 길들이 산꼭대기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길들은 결국 산정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어떤 길로 가느냐도 인생에 중요한 문제이지만 결국 ‘산이 쌓아올린 그 높이가 문제다.’ 물론 산의 그 높이는 물리적 높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의 부와 권력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삶에 대한 인식의 높이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윤리를 말하는 것이다. 산을 오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산의 그 높이를 묵묵히 쌓아올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의 주제다. 한편 산정 오르는 길에 언뜻 들었을까, ‘대숲 옆 산절 마당에 흰 구름 흐르는 소리를’, 이때 ‘흰 구름’은 진흙과 대비되는 불교적 상징이다.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속세에서 벗어난 초월과 달관을 의미한다. 또는 번뇌의 진흙밭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한다. 하산길에 들을 수 있을까, ‘산이 그 높이를 스스로 낮추는 소리를’, 이때 ‘높이를 낮추는 것’은 산이 높을수록 깊은 계곡을 품고 있는 당연한 이치를 말한다. 이는 삶에 대한 인식이 겸손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뿐 아니라 노자의 도덕경을 바탕으로 해석하면 높은 산과 같은 남성적, 수직적 이미지보다 여성성의 깊은 계곡이 생명력을 더 담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부 모던
서구 모더니즘을 우리나라 현대시에 수용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황동규의 시편들은 그 작업의 훌륭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그것이 만만한 일이 아닌 것은 시 창작자들이 서구 모더니즘을 대개 포기하거나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길은 우리식의 현대시를 추구하는 것이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강조했던 탈개성론의 현대시 창작 방법을 우리가 무시하고 과거 시 형태를 묵수적으로 답습하는 것은 복고적이라는 비판을 모면할 수 없다. 현대인은 현대 사회의 삶이 던지는 여러 가지 문제, 현대성의 필연적인 산물인 불안, 무출구성, 이상성 앞에서의 좌절(후고 프리드리히, 인용) 등에 응답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4부 ‘모던’에서 이러한 현대시 창작 방법으로 시도한 몇 편의 시들을 수록했다. 「오감도烏瞰圖」에서 현대 사회의 병폐를 날카로운 촉수로 진단하는 불길한 분위기를 표현하였고, 「네모난 세상」은 우리 자신의 시각과 현대 문명의 풍경이 안팎으로 경직화된 모습을 풍자했다. 「시계 위를 달리는 남자」의 좌절과 「열쇠」의 자기 소외 등이 가장 모던한 경향을 보여줄 것이다. 「밤의 감각」은 서사적인 이야기를 내포하면서도 다양한 이미지를 최대한 살려서 형상화하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이 시는 기존 경향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려는 노력 중 가장 최근에 창작된 것이다. 한편 「눈먼 나라의 딸들」과 「호각」은 80년대 암담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비판하고 있는 사실주의 경향으로 그 당시 작품이지만 여기 게재하였다.
안테나 위에 앉아 까마귀 운다./ 까아악 까아악 까악/ 재수 없는 놈, 벼락 맞을 놈.//
청진기를 귀에 꽂고, 주제넘은 놈./ 지가 뭔데 분수도 모르고 세상을 진단하나./
황사 날리고 가래가 끓고 기침 소리 난다.//
훠어이 훠이 저리 가, 재수 없어./ 분수도 모르고 청진기를 귀에 꽂고, 주제넘은 놈./
지가 뭔데 병든 세상 앓는 소리를 듣나.//
피뢰침 위에 앉아 까마귀 운다./ 까아악 까아악 까악/ 재수 없는 놈, 벼락 맞을 놈.//
「오감도烏瞰圖」 전문
이 시는 이상의 ‘오감도烏瞰圖’에서 제목을 따왔다. 건너편 집 옥상에 통신사 안테나가 무리져 엉켜 있는데 그 가운데 피뢰침이 솟아있다. 까마귀 한 마리가 종종 그 피뢰침 꼭대기에 앉아 운다. 그 까마귀는 검은 옷을 입고 ‘황사 날리고 가래가 끓고 기침 소리 나는’ ‘병든 세상 앓는 소리’를 청진기를 꽂고 진단한다. 이 장면에서 30년대 이상이 상상했을 불길한 시각으로 현대 사회를 진단하는 영락없는 그 까마귀의 모습이 연상된다. ‘재수 없는 놈, 벼락 맞을 놈’, ‘주제넘은 놈’과 같은 비속어를 활용하며 대상에 직접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했다. 특히 이 시는 첫 연과 마지막 연이 거의 동어 반복되는 단순한 수미상관의 구조다. 까아악 까아악 까악’, 이 까마귀 울음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훠어이 훠이 저리 가, 재수 없어’라는 대상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은 까마귀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전통 민속적인 느낌을 준다.
내 눈높이에 대국 중인 커다란 바둑판이 몇몇 보인다.. 나는 흑백 바둑돌이 어지럽게 얽힌 어느 바둑판 속 한 알의 바둑돌로 머리만 내밀고 있다..//
약간 기울어진 바둑판도 있으나 신기하게도 돌이 아래로 쏠리진 않는다.. 얼굴을 분명히 볼 수 없지만, 굳은 표정을 한 몇 사람이 나를 에워싸고 우두커니 서 있다.. 그들이 대국자인지 구경꾼인지 모르겠다..//
바둑판의 형세도 알 수 없다.. 다만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 언제나 그렇듯이 피비린내가 물씬 묻어난다.. 내가 바둑돌이라면 내 뜻과 관계없이 나를 한갓 말[馬]로 부리는 자가 따로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누군가?.. 신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역사인가, 운명인가?..//
내가 흑돌도 백돌도 아니라면, 나는 아수라 바둑판 속 관전자인가?..//
「바둑꿈」 전문
나는 일전에 이러한 바둑꿈을 실제로 꾼 적 있다. 평소 바둑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지만 뜻밖의 꿈을 꾸고 하도 생생해서 시로 표현해 보았다. 장소가 기원인지 정확히 알지 못해도 여러 바둑판들이 보이고 심지어 기울어진 바둑판들도 보였는데 내가 어느 바둑판 속에 한 알의 바둑돌이 되어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 형세를 알 수 없는 바둑판에 흑백 돌들이 서로 뒤엉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한창이다. 내가 한 판의 바둑 안에서 한낱 바둑돌인지 내가 관전자인지 알 수가 없다. 만약 내가 바둑돌이라면 나의 주체성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내 뜻과 상관없이 절대자가 주재하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가, 역사가 이끌어가는 대로 휩쓸려가는 존재인가, 타고난 운명에 내맡겨진 존재인가? 만일 내가 바둑판 속의 관전자라면 아수라 세상의 관찰자로만 남는 것인가? 이 시는 마침표를 두 번 찍어 의도적으로 문법에서 벗어남으로써 꿈이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또한 시행을 나누지 않은 산문시 형태를 취한 것도 같은 의도 때문이다.
어떤 섬에는, 섬 아닌 섬 같은 그곳에는 나무 두 그루가 마주보고 서서, 남북은 아닌데 동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100년 묵은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나뭇가지들엔 밤낮으로 깃발이 펄럭이고, 밤에는 촛불이 불 밝히는데, 사람들이 떼로 모여들어 북을 울리고 박수를 치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서로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섬이 흔들린다. 누군가 외친다. "지진이다!" 땅이 두 동강으로 갈라진다. 사람들이 나무 두 그루에 나뭇잎처럼 매달린다. 나무 두 그루를 사이에 놓고 남북은 아니고 동서인지 아무튼 땅이 갈라지자 깃발도 촛불도 없이 그 사이 서 있던 사람들은 나무 두 그루 중 어느 한편으로 달려가거나,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하릴없이 땅속으로 떨어진다. 깃발 없는 기수가 외친다. "똥간에 들었으면 똥이나 싸라!"//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노래한다. "나무야, 나무야,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지진」 전문
우리 사회 갈등 한가운데에 정치가 놓여 있다. 양대 진영을 두 축으로 하여 마치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땅이 갈라지고 그나마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던 사람도 어느 한쪽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치 갈등이 유발한 상호 반목의 지형은 꽤 유래가 깊다. 일제 강점기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 이후 우리 식민지 일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오늘날 21세기 현실에도 분단 상황이 해소되지 못한 채 이와 관련된 진영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50년대 작가 ‘선우 휘’는 ‘깃발 없는 기수’라는 소설에서 화장실 안에 이념 대립의 선전 문구가 낙서된 것을 비판하여 "똥간에 들었으면 똥이나 싸라!"고 일갈하였다. 지금 포털 사이트 댓글에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우리는 동요를 부르는 아이들처럼 진영 대립의 ‘헌집’ 대신 그 대립을 극복한 ‘새집’을 바란다.
그리운 알료샤/
그동안 잘 있었니? 수도원 생활은 어때, 지낼만해?//
나는 이 편지를 쓰려고 간밤에 얼음덩어리 잉크병을 가슴에 품었어. 시베리아 유형소는 동토의 지옥이야. 그러나 봄이 오는 소리를 희망처럼 느낄 수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가장 추울 때부터 동장군도 물러가지 않니. 그건 정말 기적 같아.//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독감을 심하게 앓았지. 내 마음속엔 세상이 다 얼어버린 듯한 억울함과 손가락을 깨무는 원망뿐이었어. 거의 미칠 지경이었지. 나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했어. 그때 죽음의 환영을 보았어. 저승사자가 긴 복도를 걸어오는 소릴 들었지. 너도 알다시피 이 형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어. 물론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했지. 스메르자코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진실이 대낮처럼 밝혀졌을 거야. 법정에 섰을 때 내 정신이 아니었어. 내가 어떻게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단 말이냐.//
나의 사랑하는 여인, 그룬센카는 나에게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어. 그건 나의 불같은 사랑에 대한 보답인가 봐. 불쌍한 그룬센카. 형이 한사코 말렸는데도 소용없었어. 이 편지도 그녀 덕분에 너에게 무사히 전달될 거야. 간수 한 명을 매수했거든. 이제 몸도 예전처럼 회복되고 다시 건강해졌어. 되돌아보면, 사실 이 모든 일들이 다 내 탓이야. 유죄 판결받아도 사지. 아버지의 죽음, 스메르자코프의 자살, 그룬센카의 고생 등.//
사랑하는 알료샤,/
그런데 억울한 심정이 물속에 가라앉고 나니 오히려 속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저 우랄산맥처럼 솟아올랐어. 그것이 내 영혼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깨달았어. 이 시베리아 유형 생활이 내가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지. 이 편지를 통해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어. 손이 너무 얼어서 더 쓰기가 어려워. 그럼 이만//
너의 진실한 형 드미트리가//
추신: 이반에게 안부를 전해 줘.//
「시베리아 유형소에서 온 편지」 전문
러시아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죄인’이라는 3부작 소설을 구상하였으나 1부만 완성하고 작고하였다. 그 1부가 소설사 미증유의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주인공은 수도원 생활을 하는 셋째 아들 ‘알료사’이지만 자유분방하고 정열적인 맏아들 ‘드미트리’가 1부의 사실상 주인공이다. 둘째 아들 ‘이반’이 당시 유럽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에 경도된 현재의 러시아를 상징한다면 ‘드미트리’는 과거의 러시아, ‘알료사’는 미래의 러시아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은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무신론자 ‘이반’에게 사주받은 사생아 ‘스메르자코프’이지만 ‘그룬센카’를 놓고 아버지와 격렬한 대립을 한 ‘드미트리’가 범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드미트리’는 시베리아 유형소로 떠나고 ‘그룬센카’는 옥바라지를 하러 동행한다. 1부 소설은 여기에서 끝난다. 작가는 2부에서 ‘드미트리’가 유형소에서 참회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을 구상했다. ‘탕아 돌아오다’라는 모티프가 2부 사건 전개의 실마리가 된다.
이 시는 ‘드미트리’가 유형소로 떠난 후 참회하는 과정을 ‘알료샤’에게 고백하는 가상의 편지이다. 만약 작가가 2부 소설을 남겼다면 이러한 편지를 실제로 한 대목에 넣을 수 있다. 서간이 당시엔 소통의 중요한 도구였으니까. ‘드미트리’는 범인이 아님에도 부친 살해라는 유죄 판결을 받고, 진실이 왜곡된 ‘부조리한’ 현실에 억울한 심정으로 유형길에 나섰다. 그러나 동토의 지옥 시베리아 유형소 생활에서 ‘드미트리’는 원망과 증오, 분노 대신 ‘모든 것은 내 탓이요.’라며 속죄하는 심경 변화를 일으키고 영혼의 구원을 갈구하며 ‘돌아온 탕아’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시베리아 유형이 ‘드미트리’에겐 성찰과 재생의 계기가 된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오듯이 정신적 성숙과 부활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주역의 택수곤(澤水困)이라고 하는 ‘곤괘(困卦)’는 곤경에 처해도 형통할 수 있다는 그 이치를 이미 다 밝혀 두었다.
동지를 달포 앞둔 11월 밤은/ 포구에 밀물이 차듯 순식간에 블랙커피 빛깔로 찾아온다.//
밤은 마술사,/ 화선지에 먹물을 풀어 검은 보자기로 달을 낳고,/
불꽃놀이 도시의 화폭이 된다.//
밤은 다크 초콜릿 맛,/ 기차는 멀리 떠나고, 홀로 남은 여인의 등을 가만히 안아준다./
그대 너무 슬퍼하지 마.//
아낙들이 버선을 새로 장만하던 동지가 다가오지만,//
아직 겨울은 아니야./ 늦가을 강물처럼 쓸쓸한 우리의 술잔을 채워주게.//
밤은 첼로의 저음,/ 별빛 어린 슬픈 눈을 그리워하는 여인에게/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긴 편지를 읽어준다.//
잠 못 이루는 그대를 위하여//
밤은 와인 향기,/ 포도의 눈물보다 더 붉은 가슴속을 달래준다.//
「밤의 감각」 전문
늦가을 밤의 이미지를 블랙커피, 마술사, 다크 초콜릿 맛, 첼로의 저음, 와인 향기 등으로 다양하게 형상화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기차로 멀리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여인은 재회를 기다리며 그의 버선을 장만한다. 남자의 부드러운 첼로의 저음이 담긴 긴 편지를 읽으며 그의 ‘별빛 어린 슬픈’ 눈동자를 그리워하며 불면의 밤을 보낸다. 밤의 시각, 미각, 청각, 후각 등 다양한 이미지들과 이러한 서사를 이중적으로 구성하였다. 시 속에 철학적 의미나 심각한 내용을 버리고, 가벼운 이야기를 넣는 대신 최대한 이미지를 살려 보려는 새로운 의도로 쓴 작품이다.
마무리
이 시집에 실린 70여 편의 작품들 중 일부를 ‘시작(詩作) 노트’라는 이름으로 자전 해설을 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시를 배반하고 사는’ 세월은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갔다. 30년 지난 후에야 다시 붓을 들고 등단을 하였다. 그 첫 작품이 ‘시지프스의 노래’이다. ‘지금-여기’에 대한 실존적 고뇌를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마음속으로 사사(師事)하는 시인 김수영의 ‘구름의 파수병’에서 비록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시들이지만 마치 참회록을 쓰는 심정으로 한편씩 원고지를 메워갔다. 어떤 시는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지은 것도 있다. 니체의 사상과 하이데거의 ‘시의 본질과 시인의 사명’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우리 선조들의 고고(孤高)한 선비 정신과 동양 철학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는 선불교의 몇몇 화두들, 중국 노자와 장자의 철학적 사유 등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하려고 하였다. 물론 시적 성취의 한계를 자각하지만, 그 시도와 노력의 의의를 인정받고 싶다. 이제는 그러한 경향에서 벗어나 서구 모더니즘을 전향적으로 수용한, ‘현대시다운 현대시’에 더욱 정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