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도선의 시 세계-
동심 어린 자연 사랑과 ‘장소’에 대한 그리움의 미학
-배도선의 시 세계-
김한빈
(시인, 문학평론가, 경성대 외래교수)
머리말
이 시집의 80편 가까운 시편들은 순수한 동심이 어린 자연 사랑과 추억이 깃든 ‘장소’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그리고 신앙과 사람 특히 가족 이야기를 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집의 작품들을 크게 4개 부로 분류했다. 1부는 순수한 동심이 담긴 자연 사랑을 노래한 시편들로 구성되고, 2부는 ‘공간’과 ‘장소’를 구분하여 추억이 깃든 ‘장소’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편들을 중심으로 모았고, 3부는 신앙과 사람 특히 가족을 중심소재로 하여 이야기체로 전개되는 시편들, 4부는 도시 풍물과 생활 소품과 관련된 작품들을 한데 묶었다. 1, 2부의 시편들이 시집의 중심을 이룬다.
1부 동심 어린 자연과 자연물에 대한 사랑
1부는 이 시집 전체에서 가장 비중이 큰 ‘동심 어린 자연과 자연물들에 대한 애정’과 관련된 시편들을 모았다. 자연물 가운데에서도 수련, 매화, 나팔꽃, 창꽃, 애호박과 호박꽃, 고목, 자목련, 달맞이꽃, 연잎, 미역 기다릴, 양파, 소나무, 참깨, 고사리, 벼, 은행잎, 난, 죽순, 무궁화 등 식물을 중심소재로 다룬 작품들을 1장으로 배치하고, 이 중에서도 특히 5편, 「수련」, 「애호박」, 「자목련」, 「벼 모종」, 「죽순」 등을 집중 해설하여 배도선 시인의 시 세계의 특징이 잘 드러나도록 구성했다. 이어 악어, 벌새, 매미, 범고래, 반딧불이, 새 등 동물을 중심소재로 노래한 작품들을 2장에 놓고, 「도심 속 매미」를 해설한다. 그다음 계절감이 물씬 풍기는 자연이나 특정한 시간의 자연을 다룬 작품들, 「꽃모자」, 「밤바다」, 「손과 발이 없어도」, 「새벽」, 「땅 고드름」, 「고드름」, 「하얀 아침」, 「봄」, 「봄의 인사」 등을 3장에, 끝으로 순수한 자연현상을 노래한 작품들, 「물소리」, 「파도」 등을 4장에 배치하였다.
수련이 예쁘게도 피었습니다./ 동그란 잎에 앉아 개골개골짝/ 개구리 구름 보며 노래를 하고/ 잠자리 그 위를 날아다니며/ 졸고 있는 꽃들을 깨워줍니다./ 졸고 있는 꽃들을 깨워줍니다.
- 「수련」 전문
이 시는 한여름 연꽃이 핀 연못의 풍경을 6행의 단순한 묘사로 포착한 동시이다. 물론 5행과 6행은 의미 강조의 반복이라서 사실은 전체가 5행과 마찬가지이다. 7•5조 3음보의 전통 운율을 활용하여 리듬감을 더욱 살렸다. 시적 화자는 독자에게 경어체를 사용하여 겸손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연못 동네의 이웃들은 수련과 개구리와 잠자리 등이다. 이들은 상생과 화합의 연못 공동체 구성원들이다. 개구리와 잠자리가 아직도 피지 못한 수련을 깨워준다는 5, 6행의 발상은 천진난만하다. 과학적 인과법칙으로 포착되지 않는 불교의 인연법과 고요하고 편안한 불교적 정밀감(靜謐感)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평화로운 연못의 정경이 한 폭의 그림같이 시각적으로 잘 형상화된 수작이다.
커다란 잎사귀 밑/ 동그란 호박/ 달님처럼 둥글게/ 혼자서 큰다/ 커다란 잎사귀로/ 양산을 쓰듯/ 살며시 들고 아기 볼 같은/ 뽀얗고 오동통통 애호박/ 낮잠을 자고 있는지/ 실눈을 뜨기에/ 좀 더 자라고 살며시/ 덮어준 호박잎
- 「애호박」 전문
이 동시는 덜 자란 어린 호박, 애호박을 둥근 ‘달’에 비유하였다가 ‘아기’로 의인화하여 “뽀얗고 오동통통 애호박/ 낮잠을 자고 있는지/ 실눈을 뜨기에/ 좀 더 자라고 살며시/ 덮어준 호박잎”으로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전반부 6행까지는 앞의 시 「수련」과 마찬가지로 7•5조 3음보의 전통 운율을 활용하여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3음보의 리듬감이 잘 살아있는 음악성을 중시한 작품이다. 이때 3음보는 명랑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시의 기본 요건으로서 자연에 대한 경이감과 애정, 순수한 동심의 체로 걸러낸 관찰과 묘사, 의인화의 발상과 정제된 순우리말의 활용 등을 잘 지켜낸 작품이다. 한편 분량 면에서 볼 때 동시의 소품화 경향을 다소나마 탈피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곱디고운 보라색/ 고상한 언어/ 신비한 쌓여진 빛/ 겉과 속이 달라도/ 아름다움 더해주는/자목련 꽃송이/ 그 모습 닮은/ 고운 사람/ 보고 싶은 사람/ 꽃그늘 아래 서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 「자목련」 전문
이 시는 전반부는 1~6행, 후반부는 7~11행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선경후정(先景後情)의 2단 구성법을 구사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중심소재인 ‘자목련’의 곱고 고상하고 신비한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가 후반부에서 그를 닮은 고운 사람이 보고 싶어 “자목련 꽃그늘 아래 서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시상을 마무리한다. 이른 봄에 피는 자목련을 반갑게 맞이하지만, 그에게서 연상되는 고운 사람은 지금 시적 화자 곁에 없다. 추측건대 시인의 ‘어머니’일 것 같다. 봄은 다시 찾아와 재생과 부활을 노래하지만 부재한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서 다시 찾을 길 없다. 그리움에 뜨거운 눈물만 흐른다. 이 시는 봄을 맞이한 기쁨과 부재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이중적으로 연주되는 감정의 대위법(對位法)을 활용하고 있다. 자목련의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시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떤 이는 서정시의 본질을 ‘안타까움’이라고 역설했다. 이 시의 주된 정조(情調, mood)는 안타까움을 지닌 비애미이다. 시인의 마음속에 묻어둔 남모를 슬픔이 고운 봄꽃을 보고 솟아오른다. 한편 이 시는 7•5조 3음보 전통 율격을 변형한 리듬감을 느끼게 한다.
한 집에 오순도순 모여 살다가/ 갓 시집간 어린 새각시처럼/ 물 댄 논바닥에 연초록 잎새/ 부끄러운 듯 줄지어 섰다//
살랑살랑 봄바람에 작은 팔/ 벌리고 파란 하늘 향해 손짓하며/ 발돋움하던 벼 모종은 하루가 다르게 키를 키운다//
오뉴월 더위에 땀 흘리다가/ 한줄기 소나기에 생기를 더하더니/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힘차게 쑥쑥 잘도 자란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참새 쫓는 허수아비와 친구가 되어/ 시원한 초가을을 맞으며/ 황금 들녘 가운데서 크게/ 웃음 지며 가을을 얻는다
- 「벼 모종」 전문
이 시는 벼의 성장 과정을 의인화 방식과 한시(漢詩) 율시(律詩)의 두련, 함련, 경련, 미련이라는 4연 구성으로 시적 형상화를 하였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 이어지는 계절의 변화에 상응하여 벼 모종이 성장하는 과정이 순차적으로 묘사된 점이 인상적이다. 특히 벼 모종이 성장하면서 여린 여성적 이미지(1연)에서 점차 힘차고(2~3연) 호탕한(4연) 남성적 이미지로 변모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눈에 띈다. 다시 말하면 무논에 모심기할 때의 벼 모종을 ‘어린 새각시’(1연)에 비유하였지만 ‘손짓하고, 발돋움하고, 키를 키우고(2연), 땀 흘리다가, 생기를 더하더니, 뿌리를 내리고, 힘차게 자란다(3연)’는 시구들에서 점차 성장하는 과정에 따라 남성적 이미지가 더해지고, ‘별을 헤아리고, 친구가 되어, 초가을을 맞으며, 크게 웃음 지며 가을을 얻는다(4연)’는 마무리에서 호탕한 중년의 남성미를 느끼게 한다. 읽는 재미와 자연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이라는 동시적 요소를 잘 살릴 시작품이다.
연두색 곱슬머리에/ 갈색 옷 차곡차곡/ 차려입고/ 대밭 여기저기서/ 로켓처럼/ 쑥쑥 올라오는 죽순//
비가 오면 키가 쑥쑥 자란/ 죽순 /뽑아오면/ 어머님은 솜씨 자랑하셨고/ 동네 어른들과 맛나게/ 먹었던 추억//
대나무가 키를 키워/ 하우스의 기둥이 되던 때는/ 값이 제법/ 있었는데/ 철근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 「죽순」 전문
‘죽순’에 대한 추억과 시대 변화에 따른 대나무의 가치 평가 절하라는 이 시의 표면적 주제가 하나의 메타포로 작용하여 산업화 시대 이후 인간의 삶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1연에서 과거 유년기에 체험한 ‘죽순’을 제시하고, 2연에서 어머니의 죽순 요리와 동네 어른들과 함께 나눠 먹던 맛의 추억을 회상하였다. 그러나 3연에서는 대나무의 가치가 이전과 달라졌다. 오랜 세월 전통적으로 대나무는 죽공예의 재료이자, 건축 자재로도 사용되었다.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여 대나무는 공예의 자리를 플라스틱에, 건축 자재의 지위를 ‘철근’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대나무(식물, 자연)에서 철근(광물, 인공)으로 대체되는 시대 변화가 담백하게 진술되었다. 이러한 시대 변화는 인간성의 변질을 수반했다는 비판이 이 시 작품의 행간에 숨어 있다.
아파트 딱딱한/ 시멘트 벽면에/ 봄을 떨며/ 붙어있는 매미의/ 숨 가쁜 울음소리가/ 슬프게 들려온다//(1연)
깜깜한 땅속에서/ 길고 긴 세월/ 꼭꼭 숨겨두었던/ 허물을 벗고//(2연)
빛나는 날갯짓하며/ 푸른 숲으로 들어가/ 밤낮 행복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텐데//(3연)
내 고향은 맑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작은 산골/ 마을 사람들/ 한 가족처럼/ 정을 나누며 살던 곳//(4연)
그곳에는 커다란/ 나무들도 많아/ 매미들 시원하게/ 노래하기도 좋고/ 신이 난 매미들/ 노랫소리도/ 쩌렁쩌렁/ 신이 났었지//(5연)
그곳이 이제는 추억 속에/ 남아 있다// (6연)
도시도 좋고 편리한/ 아파트가 좋아/ 이곳에 머문 지가/ 수십 년이 지났다//(7연)
벽에 붙은 도심 속 매미가 고향을 떠난 것만 같아/ 괜시리 서글퍼진다(8연)
- 「도심 속 매미」 전문
이 시의 시상 전개 방식은 한 편의 영화 플롯을 보는 것 같다. 시적 대상인 ‘매미’와 시적 화자가 이중적 구조로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독특한 방식이다. 1연과 마지막 8연은 수미상관의 수법으로 구성되고 ‘현재’라는 시제가 동일하다. 1연의 ‘매미의 울음소리’로 시상을 제기하고 매미의 행복한 소망이 2, 3연에 제시되고, 4연에서 시적 화자의 아름다운 자연 속 인정 넘치는 고향을 소개한 후, 2, 3연의 ‘매미’와 4연의 ‘고향’이 하나의 장(場, 공간) 속으로 통합되어 5연이 된다. 시적 화자가 가장 긍정하는 상황으로서, 고향의 커다란 나무들과 시원하고 신나게 노래하는 매미를 묘사한다. 그러나 6연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단지 추억 속에 남은 부정적 상황을 제시한다. 산업화 이후 현대를 상징하는 아파트 생활은 7연에 고백했듯이 수십 년이 지났다. 주제는 결국 1연과 마지막 8연에 있다. ‘내 고향의 커다란 나무’ 대신 ‘아파트의 딱딱하고 삭막한 벽면’에 붙어 우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듣고 고향을 떠나온 시적 화자는 ‘매미’라는 대상(지배적 심상, 모티프)을 자기와 동일시한다.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통해 부재와 결핍으로 비인간화된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깊은 자기연민으로 연결된다.
2부 추억이 담긴 ‘장소’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2부에는 자연과 자연물을 순수한 동심과 담백한 서정성을 담아 노래한 1부와 달리, 배도선 시인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과 장소’와 관련된 시편들을 모았다. 인문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의 관점에 따라 ‘공간’과 ‘장소’로 다시 구분하고 개인적 체험의 ‘장소’와 연결된 장독, 황톳길, 빨래터, 담, 고향, 댐, 순례길, 별장, 시골 밤, 장화 등을 1장으로 먼저 놓고 「장독」, 「빨래터」을 해설한다. 그리고 개인적 체험이 얽히지 않은 ‘공간’과 연결된 놀이공원, 자갈치, 비양도, 덕유산, 이기대, 맥도 생태공원, 내원사 계곡, 영천의 밤, 순천만, 청평, 체육공원 등을 2장에 배치하였다. 그중에서도 「놀이공원」, 「자갈치」를 해설한다. 1장의 ‘장소’는 그리운 유년기의 추억이 담겨 있고, 어머니가 살아계시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전통문화가 보존되어 있고, 가족들과 친지들과의 추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태도가 순례길에도 잘 드러난다. 개인적 체험과 관련된 이러한 ‘장소’에 대한 애착이 시인의 주요한 개성으로 포착된다. 2장의 ‘공간’에는 부산의 명물 자갈치를 비롯해 이기대 공원, 맥도 생태공원 등지를 가벼운 행장으로 둘러보고 국내 유명 관광지인 비양도, 덕유산, 내원사 계곡, 영천, 순천만, 청평 등지를 여행하면서 그 감회를 노래한 작품들을 모았다.
연륜과 시간들이/ 빚어내주던/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 위의 어머니가/ 맛 내기 하신//
집안의 가장 귀한/ 장맛의 보물/ 장독대는 반질반질/ 빛이 나고//
가족들과 집안의/ 대소 간의 맛/ 그 집안의 음식이/ 어머니의 맛//
장독의 깊고 깊은/ 끊임없는 장맛/ 우리가 살아가는/ 핏줄처럼 소중한 맛//
그 장독이 이제/ 제자리가 아닌/ 장식품으로/ 커다란 음식점 앞에/ 상처 난 독은 수술을 하고서/ 누워서 긴 휴식을 하고 있다
- 「장독」 전문
우리의 전통문화 가운데에서도 특히 장독대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풍물이다. 어느 가문의 종갓집이 아니어도 승려 많은 큰 사찰이 아니어도 서민들의 살림살이에 장독이 필수품이었고, 장독은 그 장맛과 함께 대를 이어 전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장독은 존재 가치를 위협받고, 더욱이 깨진 장독은 실용성마저 전혀 없다. 그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식물로 전락하게 되었다. 과거에 크고 작은 장독들이 늘어선 장독대는 우리 어머니들의 가사 활동의 주요 공간이었다. 부엌이 집 안에 있다면 장독대는 부엌과 가장 가까이 연결된 집 밖에 있었다. 우리 할머니들이 정화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던 곳도 장독대 부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장독대라는 특정한 장소를 잃어버렸다. 인문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이러한 가치가 부여된 ‘장소’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인간의 기본 감정이라고 말한다. 배도선 시인은 개인적 체험이 얽혀있는 ‘장소’에 대한 애착을 여러 시편을 통해 잘 보여준다.
어머니가/ 방망이질하던 곳/ 마음 때 두드리며 헹구어 널고//
내리내의 기저귀 빨아 널던/ 이 설움 저 설움/ 모진 서러운 방망이의 눈물//
그 자리에 옹기종기 모인/ 반쯤 벌어진 사립문 같은/ 할머니들 웃음소리
- 「빨래터」 전문
빨래터나 우물가는 여성의 일터요 대화를 나누는 소통 공간이다. 빨래하면서 마음까지 정갈하게 씻기도 하고 세탁물에 방망이질하며 여성의 삶에 가해진 온갖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기도 한다. 쑥덕공론의 정보 교환처요, 여성의 애환이 깃든 이곳에 “‘반쯤 벌어진 사립문 같은’ 할머니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일부 치아가 빠진 모습을 ‘반쯤 벌어진 사립문’에 비유한 것이 참신하고 재미있다. 세상을 따듯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긍정적 태도가 이러한 유머 있는 표현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이제 가치가 부여된 ‘장소’는 추억 속에서 아름답게 회상되지만, 현실에선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어 시인은 안타까운 심정이다.
해님도 심심해 날마다 오지요/ 아이들 웃음소리 환한 얼굴로/
놀이공원 재미난 그곳에 가면/ 모두가 꽃이 되고 해가 되지요/
연못에 물오리 부들 끝 잠자리/ 아이들 노랫소리 파란 봄 하늘/
나무들이 한 아름 예쁜 꽃 들고/ 반갑다 어서 오라 손을 흔들죠
- 「놀이공원」 전문
이 시는 8행의 동시이다. 동시의 소품화 경향을 탈피한 작품이다. 7•5조 3음보 전통 운율로 명랑 경쾌한 리듬이 잘 살아난다. 봄날 야외 놀이공원에서 아이들이 즐거이 뛰노는 광경을 경어체로 묘사한 것이 더 정겨운 느낌을 준다. 따사로운 햇살과 연못이 있고, 나무와 꽃들이 있는 놀이공원은 아이들에겐 해방구요, 천국이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짭조름한 해풍/ 어선들이/ 가득한 자갈치/ 부산의 최고 생선 시장/ 없는 것이 없는/ 생선과 문어/ 온갖 횟거리 생선들/ 전복, 소라, 해삼/ 물을 쭉쭉 품어대는/ 조가비와 조개들/ 상인들의 인사/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퍼뜩 오이소/ 살펴 가이소/ 또 올거지예//
새벽시장에는/ 유월의 푸르름처럼/ 활기가 넘친다/ 무료함이나 삶의 무게에/ 지친 이들은/ 자갈치 새벽시장으로/ 와 보세요/ 물고기만큼이나 싱싱함이 엉킵니다/ 삶의 활력소가 필요하다면/ 찾아오세요/ 인삼 녹용을 먹은 듯/ 힘이 솟아 날 것입니다/ 부산 자갈치 시장으로/ 한번 와 보세요
- 「자갈치」 전문
이 시는 부산의 명물, 활기찬 자갈치 시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상인들의 사투리가 정겹게 들린다. 1연은 보여주기(showing) 수법을 활용하여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부산 앞바다와 어선들, 자갈치 시장과 상인들의 정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연은 말하기(telling) 수법을 활용하여 시장 방문을 권유하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가 반복하여 제시된다.
3부 신앙과 사람 특히 가족 이야기
3부의 시편들은 자연과 자연물, 공간과 장소가 아닌 ‘신앙과 사람 특히 가족’을 중심소재로 하여 이야기체로 전개된다. 기독교의 신앙을 바탕으로 쓰인 「아빠와 나」, 「수도자」, 「묵상 중」, 그리고 친구에 대한 그리움, 시골 사는 여동생과의 「가을걷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화전」, 시인 자신의 옛일기장에 남은 단풍잎을 보고 추억을 더듬는 「잠든 단풍」, 모깃불을 피운 「별 밤」, 홍시를 통해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외할머니」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을걷이」와 「화전」 두 편에 대한 해설을 싣는다.
농사와 장사를 힘겹게 해내는/ 시골 사는 여동생/ 일손이 부족하다며 도와달란다//
다듬어 놓은 밭 위에/ 구멍 난 검은 비닐을 덮고/ 겨울도 이겨낼/ 마늘을 동생과 함께 심었다//
마당 한쪽에는/ 한철을 마감한 고춧대가/ 산더미처럼 쌓여/ 붉게 익어가는 중이다//
동생이 장사 나간 늦은 밤/ 남편과 둘이서/ 불을 켜고 고추를 따면서/ 지나간 이야기로/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저녁 늦게 돌아온 동생과/ 옛이야기 하면서/ “너 생각 나.”/ “언니는 생각난다, 생각난다.”며/ 지나간 추억들을 떠올리며/ 깨알 같은 밤을 보냈다
- 「가을걷이」 전문
이 시는 시골 사는 여동생의 일손을 도와주러 남편과 동행하여 갔다가 자매간 공유하는 옛 추억을 회상하면서 ‘깨알 같은’(깨가 쏟아지는) 단란한 밤을 보낸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다. 여동생의 시골 농사짓는 모습이 2, 3연에 잘 드러나고, 4연에서 부부애가 좋은 남편과 얘기하며 웃는 모습을 제시했다가 마지막 연에서 여동생과 함께 기억하는 옛 추억들을 나누며 정겨운 밤을 보낸다. 자매간의 사랑이 잘 우러나온다. 그것은 이야기체의 특징을 잘 살려서 현장감이 넘치는 묘사를 한 덕분이다.
어머니는 화전을 부치셨다/ 찌짐 판은 어깨의 마음처럼 뜨거워/ 손끝에서 박꽃 같은 화전이 피었다//
그 내움이 그리움 되어/ 어머니 생각이 피어오른다//
화사한 박꽃 같은 어머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향기가 그립다//
어느 먼 곳에서 박꽃같이 피어있을 어머니/ 지금/ 그 향기를 만나러 가고 싶다
- 「화전」 전문
이 시는 시각, 촉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화전을 부치시던 ‘박꽃 같은’ 어머니의 향기가 그립다. ‘어느 먼 곳에서 박꽃같이 피어있을 어머니’의 그 향기를 그리워한다. 어머니를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한 이 시를 통해 그동안 현대시가 중시했던 시각적 이미지가 이 시와 같이 촉각과 후각 등의 복합적 감각과 결합하여야 온전한 이미지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4부 도시 풍물 혹은 생활용품에서 느끼는 감회
4부는 축제 형식의 불꽃놀이, 생활용품으로서의 이불, 도시 교통 수단인 김해행 경전철, 신발장, 마스크 등 도시 풍물이거나 생활 소품과 연관된 작품 중에서도 특히 「조각 이불」, 「신발장」 두 편을 해설한다.
내 삶의 굴렁쇠가/ 신작로 위로/ 논두렁 좁은 길도/ 산허리춤도/ 달려올 때마다/ 돌멩이가 없으며/ 가시인들 없었겠는가//
그래도 길 달리고/ 쉼 없이 달리며/ 하나하나 모아두었던//
그 많은 꿈들/ 지푸라기처럼 쌓여/ 푹석한 짐들/ 잠자고 있기도 하고//
버려달라 떼쓰고/ 다듬어달라/ 눈길을 보내기도/ 반짝이는 빛/ 오랜 길 뒤돌아서/ 보고 있는 나/ 외면 못 하게 하고/ 나를 봐 달라/ 재촉하는 저 무리/ 조각들 고이 모아/ 이불을 누비듯/ 재봉틀 땀땀이 복실을 만나/ 살아왔던 그림자/ 수를 놓는다
- 「조각이불」 전문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아오는 동안 시적 화자는 마치 작은 소망(‘꿈’)을 모아둔 것 같은 조각난 천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본다. 어떤 것은 ‘지푸라기처럼’ 낡아가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아예 ‘버려달라’고 애원하는 것도 있고, 구김살을 펴 달라고 하는 것도 있고 눈길을 사로잡는 것도 있다. 곡절 있었던 지난 온 삶을 회상하듯 그동안 모아둔 조각천을 보고 마치 추억들을 한데 고이 모으는 것처럼 조각이불을 누빈다. 시적 화자는 이미 원숙한 정신적 경지에 이른 여인이지만 젊은 날부터 걸어온 ‘오랜 길’을 되돌아보면서 ‘살아왔던 그림자’에 오히려 아름다운 수를 놓는다. 마치 조선의 신 사임당이나 허 난설헌의 시를 읽는 듯하다.
좁은 셋방처럼/ 칸칸이 쪼그리고 앉은/ 크고 작은 분신들/ 좁은 어깨 움츠리며/ 오늘도 여정을 기다린다//
지난달/ 막내딸이 생일 선물로 사준/ 이름 있는 새 신발을/ 얼굴 반짝거리며/ 환한 미소가 가득하고//
한쪽 구석/ 고개를 처박고 있는/ 오래된 신발/ 숨죽이며 나를 색 바랜 얼굴로/ 보기에도 서글프다/ 지난날 늘 함께 걸으며/ 수많은 시간 속에/ 쇠퇴해진 그 모습이/ 나를 보듯 애처롭다
- 「신발장」 전문
현관 입구에 있을 신발장 안에 막내딸이 사준 ‘새 신발’과 색 바랜 ‘오래된 신발’이 대비되어 놓여 있다. ‘새 신발’은 환한 미소가 가득하나 ‘오래된 신발’은 색 바랜 얼굴로 서로 대조된다. 시적 화자는 후자의 신발에 감정동조가 일어나고 대상과 일치감을 느낀다. 이는 서정시의 본질이다. 이 시는 두 켤레 신발이라는 시적 대상이 대조를 이루면서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영국 문예 비평가 T.S 엘리어트가 강조한 객관적 상관물인 후자에 대한 감정이입과 일체감을 보여 고흐의 ‘구두’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작품이다.
마무리
배도선 시인이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갖는 절대자에 대한 사랑과 경배, 종교적 삶의 태도가 그의 시문학 세계의 근저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 이미 원숙한 정신적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순수한 동심의 눈을 시심(詩心)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연과 자연물을 동심 어린 경이로움으로 묘사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서경 세계를 그려낸다. 또한 전통 운율을 되살려 리듬감이 풍부하고, 문학적 형상화의 방법은 서정시의 본질에 닿아 있어 자아와 세계의 일치라는 시 양식의 문법에 충실하다. 그리고 다채로운 시상 전개 방식을 보여주며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를 제시하고, 시편마다 지배적 심상과 객관적 상관물이 잘 살아있다. 특히 개인적 체험이 담긴 ‘장소’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시인의 독특한 개성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가족 이야기에서 우러난 사랑과 그리움은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