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현 군의 서울과학고 자퇴소식 이후 언론은 학폭 등의 이슈에 주목하는 듯 하더니, 결국 영재교육 시스템 문제로 연착륙하며 기승전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도식을 되풀이했다.
전국의 유망한 인재들을 모아 특정 과목들을 심화, 양질의 교육을 시키는 영재교육의 가치는 참 숭고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우리나라 영재교육은 내가 보기엔 망했다. 영재교육의 문제는 비단 수학과학만을 특성화한 영재학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영재들을 모아놓은 예술고와 외국어 영재들을 모은 외국어고등학교도 절대 낫지 않는 만성몸살처럼 동일하게 앓고 있는 문제들이다.
영재특성화고가 처음 등장해서 운영되었을 당시에는 이런 문제가 거의 없었다.
그 때는 왜 문제가 없었냐면 이유는 단 하나.
서울대학교가 '비교내신제'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내 경험 기준으로만 말하자면
서울대학교에서 외국어계열에 시험을 치르는 외국어고등학교 학생들의 내신점수를 수능점수에 비례해서 인정해줬다.
그래서 90년대 말 대원외고에서 한 해에 100명이 넘는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하며 외고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그 쓰나미의 휩쓸려 나 역시 동네의 가까운 외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내가 1학년 생활을 하는 내내 학생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비교내신제 폐지'여부였다. 비교내신제가 폐지되면 우리들 중 절반은 서울대에 갈 실력이 됨에도 불구하고 내신 때문에 서울대에 입학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일반고에 진학했더라면 괜히 쓸데없는 고난이도 공부를 덤으로 얹어서 하지 않으면서도 내신을 쉽게 따고 정시든 특차든 원하는 전형을 골라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는 아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발언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입학했던 학년에는 연합고사가 폐지되는 해였는데, 그 해에만 특별하게 연합고사 점수로 과고, 외고를 선발했던 이벤트가 있었다. (원래는 외고, 과고 입학시험이 따로 존재) 연합고사 점수 기준으로 과고 입학컷이 198점, 외고 입학컷은 학교마다 조금 다르지만 194-5점 선이었다. 당시 중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 하는 아이들은 특목고 입학원서를 안쓴 아이가 거의 없었고, 거의 모든 전교권 모범생들이 특목고 원서를 썼다는 전제하에 연합고사 195점이상은 특목고가 올 싹쓸이를 했던 특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 97년 고입이었다.
일반고에서 전교 1등으로 선서를 하고 들어간 아이들의 연합고사 점수가 194점 이하로만 구성된, 정말 특이한 해였다.
연합고사 성적 기준 195점 이상을 받은 아이들은 전국에 6000명 가량이었고, 당시 서울대 입학정원이 그정도 되었기 때문에, 일단 중학교까지의 성적만 놓고 봤을 때에는 그 해에 특목고를 들어간 아이들은 서울대 입학 자격이라도 받은 것마냥 상당히 들떠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합고사 점수가 뭐가 중요하냐, 대입이랑 차원이 다른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해에만 중요했다. 그 해에는 연합고사 점수로 특목고를 선발했기 때문에 상위권 아이들은 연합고사에 목숨을 걸었다. 리틀 수능 같은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듯, 서울대학교는 특목고 비교내신제를 폐지했고, 특목고 재학생들의 대탈출 러쉬가 이어졌다. 일단 99학번부터 그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내 윗학년 선배들은 전학보다는 자퇴를 선택했다. 자퇴를 해야 내신이 깔끔해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윗학년 교실 중에는 55명 정원에 30명 이상이 빠져나간 교실도 있었다. 선배들이 다 학교를 그만둔다는 소식을 접하며, 우리 학년 아이들도 상당히 불안한 2학기를 보냈다.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엄청나게 눈치를 봤던 것 같다.
결국 1학년이 끝나가는 시점에 한 두명씩 전학을 가기 시작했다. 학년이 마감되는 2월에는 하루에 여러명씩 우루루 전학간다는 인사를 남기며 떠나갔다. 나 역시 그 무리 중 하나가 되었다.
전학을 간 아이들의 성적이 하위권이어서가 아니었다.
1등급이 안될 것이면 어중간한 상위권 내신은 필요없기 때문이었다.
서울대는 올 1등급 내신만을 요구한다. 전과목 말이다.
아니면 특차로 수능에 올인하여 가던가.
본인의 선택이다.
당시 수능에 올인하고 내신을 버리기로 한 아이들은 그냥 특목고에 남고 해피하게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아련한 20여년 전의 추억이다. 남는 아이들의 계산 속에는 '그래도 뭐 연고대는 가겠지'란 안정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당시 입시제도 여건에서 서울대를 못간 특목고 아이들은 연고대라도 갈 수 있는 마지노선이 있었다. (본인의 수능성적이 그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한)
그런데 이놈의 대입 제도가 점점 개악이 되어버려, 특목고에 진학한 아이들의 '연고대는 가겠지'란 희망의 마지노선까지 무너뜨렸다. 전국의 고등학교를 동일선상에 놓고 '내신평가'와 '학교생활평가'를 한다고 하니, 특목고에 진학한다는 것은 바보 아니면 멍청이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불리해졌다.
특정 영역을 특별히 잘하는 아이들을 도대체 왜 모아놓는 것인가? 내신에 불리함을 주고 0.1점에 등급을 떨어뜨리는 지옥의 불맛쇼를 경험하게 해주려고? 특수목적 고등학교의 취지는 우수한 아이를 '선발'하여 심화교육과 특수교육을 시켜서 인재를 양상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실상은 아이들의 내신 등급을 상대평가하기 위해 심화교육이 아니라 줄세우기를 위해 선행을 하지 않거나 사교육을 병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괴상한 문제들이 출제되고 학문적 심화와 깊이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한 쓸데 없는 공부에 엄청난 시간낭비를 해야 하는 지옥의 3년의 커리큘럼으로 운영되고 있다.
학교알리미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전학교 과목별 평균.
전교생이 전체과목을 모두 90점 이상의 평균을 받는다.
누군가 한문제 실수하면 내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상위권대학이 특목고 아이들에게도 내신등급제를 산술적으로 적용해서 '공정하게' 선발을 해야 된다는 건 말이 안된다. 오히려 불공정해보인다.
이번엔 서울과학고 1학년 1학기 전체 평균성적을 가져와봤다
이쪽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 학년이 90점 이상이나 80점 이상대의 평균점수를 내고 있다.
내신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이 표를 보면 체감이 될 것 같다.
이건 일반계 고등학교 점수표다. 시험난이도는 특목고의 시험난이도의 절반도 안된다고 보면 된다.
영재학교와 영재교육 시스템은 문제 없다.
대입시스템이 문제다.
대학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해 만든 평가제도가 '표면적'인 수준에 그치는 지 '심층적'인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변별력이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고, 여론에 휩쓸리지 말고, 제대로 된 인재를 정말 진심으로 뽑을 마음을 가지고 제도를 손본다면 비교내신제는 어떠한 형태로든 당연히 부활해야 하고, 수능 역시 연간 3-4회가량 치르는 방식으로 변경하여 가장 좋은 점수를 골라 대입에 사용하되, 실제 대입은 수능점수가 전부가 아닌, 논술시험, 에세이나 자소서 등 학생의 면면을 깊이 관찰할 수 있는 정성적인 평가 방법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특목고는 이미 그렇게 애들을 뽑고 있다. 대입제도가 특목고 입시제도를 못따라가고 있는 역전현상이 발생하고 있는데, 특목고 입시는 소수만 응시하니 이 상황을 전국민이 아직 모르는 것 뿐...
특정고등학교 그룹에 특혜를 주면 과도한 특목고 입시열풍으로 조기사교육 시장이 과열될 것이라 우려하는 여론이 지배적이라면 영재교육을 하면 안되는 것이고 영재교육을 인정할 것이면 특목고 내신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된다.